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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다는 것 - 문 숙

환하다는 것      - 문숙   중심이 없는 것들은 뱀처럼 구불구불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며 길을 간다   능소화가 가죽나무를 휘감고   여름 꼭대기에서 꽃을 피웠다   잘못된 것은 없다   시작은 사랑이었으리라      한 가슴에 들러붙어 화인을 새기며   끝까지 사랑이라 속삭였을 것이다   꽃 뒤에 감춰진 죄   모든 시선은 빛나는 것에 집중된다   환하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 위에서 꽃을 피웠다는 말   낮과 밤을 교차시키며   지구가 도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돌고 돌아 어느 전생에서   나도 네가 되어 본 적 있다고   이생에선 너를 움켜잡고   뜨겁게 살았을 뿐이라고   한 죽음을 딛고 선   능소화의 진술이 화려하다      — 문학청춘> 2017년 여름호     * 감..

남주 생각 - 정희성

남주 생각 - 정희성 남주는 시영이나 내 시를 보며 답답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뉘 섞인 밥을 먹듯 하는 어눌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시영이나 나는 죽었다 깨도 말과 몸이 함께 가는 남주 같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기껏 목청을 높여보았자 자칫 목소리가 따로 놀 테니까 시영이도 그렇겠지만 나는 나대로 감당해야 할 몫이 따로 있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건 무슨 변명 같기도 하고 비겁한 듯도 하고 하여튼 일찍 간 남주 생각을 하면 내가 너무 오래 누렸다는 느낌이다 - (창비, 2019) * 감상 : 정희성 시인. 1945년 2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부터 숭문고등학교 교사로 35년 교단을 지키다가 정년 퇴직했습니다. 1970년 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