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환하다는 것 - 문 숙

석전碩田,제임스 2019. 6. 26. 06:45

환하다는 것  

 

                                   - 문숙

 

중심이 없는 것들은 뱀처럼 구불구불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며 길을 간다  

능소화가 가죽나무를 휘감고  

여름 꼭대기에서 꽃을 피웠다  

잘못된 것은 없다  

시작은 사랑이었으리라   

 

한 가슴에 들러붙어 화인을 새기며  

끝까지 사랑이라 속삭였을 것이다  

꽃 뒤에 감춰진 죄  

모든 시선은 빛나는 것에 집중된다  

환하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 위에서 꽃을 피웠다는 말  

낮과 밤을 교차시키며  

지구가 도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돌고 돌아 어느 전생에서  

나도 네가 되어 본 적 있다고  

이생에선 너를 움켜잡고  

뜨겁게 살았을 뿐이라고  

한 죽음을 딛고 선  

능소화의 진술이 화려하다   

 

<문학청춘> 2017년 여름호  

 

* 감상 : 문숙 시인. 1961년 경남 하동 출생. 동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0<자유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계간 <불교문예> 편집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단추> <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 2012)가 있습니다.  

 

년 전, 문숙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능소화의 환한 아름다움을 노래한 환하다는 것이란 시였습니다.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6월 어느 날, KTX를 타고 고향을 가는 열차 안에서이지 않나 기억됩니다. 차 안에서 읽을 책을 찾다가, 마침 소설 <능소화>를 구입해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었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일간 신문에 이 시가 소개 된 날도 바로 그 날이었지요. 그 후, 요즘처럼 능소화가 활짝 피기만 하면 그녀의 이 시가 생각나곤 합니다  

 

숙 시인의 시는 일상생활 어디서나 소재를 갖고 와서, 평범한 시어와 과장되지 않은 수사적 기교, 그리고 어려운 표현 없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단어들로 채워지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들을 읽으면 다림질을 하면서도, 양치질을 하기 위해 치약 튜브를 짜면서도,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도, 또 배관이 터져 아래층에서 물이 샌다고 연락이 와 한바탕 소동을 벌이면서도, 부엌에 있는 양파 망을 보면서도 시적 은유가 발동되어 한 편의 시가 탄생될 수 있구나 할 정도로 생활 주변에서 시를 길어 올리는 능력이 탁월한, 천상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를 보면, 유월의 골목길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화려한 꽃, 능소화에 시인의 눈길이 끌렸나 봅니다. 그리고 그 화려한 능소화가 무엇인가를 칭칭 감고 올라가는 넝쿨 식물이라는 습성을 잘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꽃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올 법한 사랑 이야기를 시적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가죽나무를 칭칭 감아 타고 덩굴로 올라가는 능소화의 모습이 마치 서로를 옭아매면서 사랑하는 운명적 사랑을 닮았다고 느낀 듯 합니다  

 

쯤에서 오늘은 소설 <능소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덤으로 조금 해야할 것 같습니다

    

<능소화>는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짤막한 기사 한토막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19984, 경북 안동시 정상동 택지지구 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무덤에서 미이라 한 구가 발견이 되었는데, 그 미이라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습니다. 숨진 남편을 그리워하는 원이 엄마라는 여인의 편지글이 그대로 출토가 된 것입니다.'  

 

로 이 기사에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소설 한 권이 탄생된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 능소화가 어떤 꽃인지에 대한 설명이 그것입니다. '능소화는 본디 하늘의 꽃인데, 누군가 훔쳐 인간 세상에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 능소(凌霄)'하늘을 능멸하는 뜻'이니 하늘에 닿을 듯 뻗어간다고 해서 '하늘을 이기는 꽃'이란 별칭과 함께 '하늘 꽃'으로 불렸습니다. 예부터 이 꽃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또 얼마나 높이 자랐으면 이런 별칭이 다 붙었을까요. 이런 이유 때문에 혹시 집안의 여자들이 바람이 날까봐 가정 집에는 이 꽃을 절대로 심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기도 하고, 또 이 꽃 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헛 소문도 나돌 정도였다고 하니 그와 연관된 사랑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해피앤딩일 수가 없었나 봅니다.  

 

시 시로 돌아와서, 화려한 능소화를 보면서 시인이 바라 본 것은 그 화려하고 환한 아름다움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화인이 남을 정도로 고통을 주고 숨통을 조이는 운명'입니다. 온통 가득, 화려하게 피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능소화의 활짝 핀 모습이, 한 죽음을 딛고 서서 무슨 변명인지 모르지만 마구 하소연하는 수 많은 입들로 비쳐진 것입니다.  

 

늘 다시 이 시를 꺼내 읽으면서, 누군가의 화려한 성공, 환한 삶을 위해 뒤에서 희생하면서, 또는 그가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은 끝간데 없는 욕심 때문에 속절없이 숨어서 희생해야 했던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을 세심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한번 가져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 편의 시로 문숙 시인을 그냥 넘어가기가 아쉬워 그 녀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그 녀의 시가 어떤 맛깔스런 매력이 있는 지 한번 맛을 보시기 바랍니다. - 석전(碩田)

 

기울어짐에 대하여  

 

                                      - 문숙  

 

친구에게 세상 살맛이 없다고 하자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보란다  

생각해보니 옳은 말이다  

 

노처녀였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짝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된 것도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체 게바라도 김지하도  

삐딱하게 세상을 보다 혁명을 하였고  

어릴 때부터 엉뚱했던 빌게이츠는  

컴퓨터 신화를 이뤘다  

꽃을 삐딱하게 바라본 보들레르는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고  

노인들도 중심을 구보려  

지갑을 열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돈도 연애도 안 되는 날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그 도수만큼  

슬쩍 기울어져 볼 일이다  

 

- 시집 <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시선,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