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조간신문을 읽다가 만난 글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이면서, 또 주옥같은 수필로 친근해 진 유안진 교수의 글입니다. 아마도 올 2월 말로, 정년 1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을 하나 봅니다.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유를 잘 표현한 글이 있어 이곳으로 옮겨와 봤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또랑 또랑한 제 정신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고백에서 전율감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나는, 너무 앞뒤를 가리면서 얄밉게 자신의 일을 잘 챙기면서 제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돌아 보게 하는 그런 글입니다.
[유안진 칼럼]제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살아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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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정신도 비슷하지 않을까. 시 쓰느라 망해 버린 이가 어디 천상병 시인 하나뿐인가. 초등학교 때 이미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했고 백과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해박했으며, 서울대 상대를 졸업할 정도로 명석한 천상병 시인은 시 때문에 망해 버려 시로 성공한 대표적 예가 아닐까. 그렇게 철저하게 망하지 않으면 몇 편의 절창(絶唱)을 얻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시인정신이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그래서 시인들은 제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살고 싶어들 한다. 너무 제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제때에 결혼하고 직장 다니며 가족 부양에 정신 없었노라고. 여성 시인이라고 어찌 예외이겠는가. 입시생들의 밤샘 공부가 고통뿐이기만 한다면 어떻게 밤새우는 고통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 자원봉사 같은 사람 사랑, 일 사랑, 신의 사랑 등에 미친 이들, 기술 개발, 학문 탐구의 연구나 실험, 발명, 발견, 정복 등에 미친 사람들도 제정신이 아닌 정신 아니면 지속할 수 없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런 제정신이 아닌 정신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가 행·불행의 관건일 것이다. 평생을 제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무엇에 빠져 홀린 듯이 사는 이들은 고생을 호강으로 누리는 행복한 이들이지만 도중에 제정신으로 돌아와 버리는 이들은 허무와 고통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남의 눈에는 제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보일지 모르나 본인 당사자에게는 그야말로 진실되고 정직한 제정신이 아닐 수 없는 것을. 2월 말일로 나는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정년을 1년 남겨두고 말이다. 대학교수처럼 쉬운 일도 없는데 그걸 못 참다니 한심하다는 이도 많다. 물론 그렇게 교수하는 이들도 있겠지. 그러나 교수라고 다 그렇게 일하는 건 아니다. 물러나려면 몇년 앞서 했어야지 1년 앞둔 퇴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들이 있고, 정년 채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거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또랑또랑한 제정신으로 살아왔다고 깨닫는 순간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유종의 미라는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등 떠밀어도 안 나가는 시대에 제 발로 먼저 걸어 나오다니? 우리 문화에서는 늘 칠·팔할이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홉이란 숫자를 최대로 치고, 열을 채우면 내려가는 일만 남았기 때문에 불운을 예상하는 숫자로 본다. 다 채우고 다 차지한다면 무엇이 남아서 기다리는 이들의 몫으로 돌아가랴.
무엇이나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병이고, 먹고 토하더라도 내 몫은 내가 다 먹는다는 생각도 병이며, 무엇이나 내가 다 해내야 한다는 생각도 오만이라고. 나의 많은 몫을 신의 몫으로 맡기고, 나를 남 보듯이 생각하는 것도 제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사는 게 아닌가 하고. 살아 보니 내 힘으로 내가 다 해야 할 일은 너무 적더라고. 많은 부분은 내가 건드려서 잘못된 경우도 많았고, 가만 두었더라면 더 유능한 이가 더 잘했거나, 안 보이는 분이 안 보이는 힘으로 분복(分福)에 맞게 이루었을 거라는 후회도 많았다.
출애굽의 광야시절 만나를 보자. 적게 거두는 자도 많이 거두는 자도 하루만 먹을 수 있었고 나머지는 썩어 벌레가 났다 했지. 잘 산다는 건 의식주만은 아니라고. 공부 중인 아이들도 제 인생을 살게 하자고. 물론 몇 푼의 연금이 비벼댈 언덕이 된다 싶지만, 늦었으나 제정신이 아닌 정신으로 살고 싶어서, 너무 바짝 정신 차리고 살아왔다 싶어서 말이다.
시인 서울대교수
(세계일보 2006. 1. 23일자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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