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미지근에 대하여 - 박정남

석전碩田,제임스 2018. 9. 3. 19:55

미지근에 대하여 

 

                                 - 박정남  

 

국수를 주문하는데   

전원이 다 미지근한 국수가 좋다고 해  

미지근을 시켜놓고 보니  

이 모임 참, 미지근해서 오래간다 싶다  

생각하니 다다음달이 벌써 10주년이 되는 달이다  

미지근이 미덕이 되었으니   

이젠 이름 하나쯤 가져도 좋겠다는 제안에   

누군가 미지근으로 하자고 하여  

웃으며 결정을 보았다  

이름 하나 얻는 데도 장장 10년이 흘렀으니   

그 뿌리도 참, 미지근하게 깊다  

 

미지근해서 술술 잘 넘어가는 국수에   

국물까지 두 손으로 받쳐들고 단숨에 들이켜자  

배가 남산만하게 부풀어 오른다  

어느덧 남쪽 산에선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다  

미지근하게 끓어오르는 정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곰곰 생각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저 바다는   

단절이 아닌   

()와 지()에 뿌리()를 박았던 것  

한결같은 그 마음 위로   

미지근한 달빛이 요요하기만 하다  

 

- 월간 현대시학20143월호  

 

* 감상 : 어느 날 오십 줄에 들어선 조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은 '종교 과잉, 의견 과잉, 정치 과잉'인 사람들이 많아서 한국에서 잘 살려면 이런 개인 취향에 해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관(Argue)하지 않고 Fact(사실)에 대해서만 얘기해야 한다" 라고. 이 말을 듣고 보니, 그런 듯 합니다. 내 주변에 호불호가 너무도 명백한 사람들, 자기 입장이 너무도 분명한 사람은 관계를 맺는 일에 쉽지 않은 걸 보게 됩니다.  

 

오늘 읽은 시는, 회원으로 모인 사람들이 하나 같이 우유부단, 미지근한 성격의 소유자들입니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빙그레 웃음이 나오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들의 모임 이름도 10년 만에야 정할 정도면 그 미지근함이야 말 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분초를 다투듯이 급하게 살아가는 이 세대에는 이런 미지근이야말로,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이해해주는 최고의 미덕이 되었으니 아이러니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00년 전 기록된 성경 요한계시록에도 '미지근'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덥든지 차든지 하라'고 하면서 미지근한 믿음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이 때 쓰인 단어가 'Lukewarm'이라는 단어인데,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썼던 의사 누가(Luke)가 이 당시에는 모르긴 해도 너무 이지적이고 팩트에 강한 성격이어서 오히려 미지근하다고 평을 받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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