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영목에서 - 윤중호

석전碩田,제임스 2022. 8. 31. 06:59

영목에서

- 윤중호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도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서서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詩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뜻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 유고 시집, <고향 길>(문학과지성사, 2005)

* 감상 : 윤중호 시인. 

1956년 충북 영동군 심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숭전대학교(현 한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계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그 후 이은봉 시인 등과 <삶의 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격월간 <세상의 꿈>을 창간했고, 월간 <새 소년> 편집 주간, 보리 출판사 편집장 등 잡지사, 출판사 편집인 등의 일을 하면서 시도 쓰고 또 동화도 썼습니다. 2004년 9월, 췌장암으로 이른 나이인 48세에 별세하였습니다.

집으로는 <본동에 내리는 비>(문학과지성사, 1988), <금강에서>(문학과지성사, 1993), <청산을 부른다>(실천문학사, 1998) 등이 있습니다. 2004년 12월에 있었던 어머니의 칠순을 위해 준비했던 시집이, 9월 갑작스런 암 발병으로 타계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는데 온누리 출판사 대표 김용항 등 몇몇 지인들이 뜻을 모아 시인이 타계한 지 1주기가 되는 2005년 출간한 유고 시집 <고향길>(문학과지성사, 2005)이 있습니다.

문집으로 <느리게 사는 사람들>(문학동네, 2000), 동화집으로 <눈먼새 날개펴다>(푸른나무, 1990), <지각대장 쌍코피 터진 날>(온누리, 2002), <감꽃마을 아이들>(온누리, 2004), <두레는 지각대장>(온누리 2004) 등이 있습니다. 2022년 3월에는, 그의 18주기를 맞아 시인이 생전에 남긴 세 권의 시집과 유고 시집에 실린 시, 그리고 미발표 시 등을 총망라 247편의 시가 담긴 <윤중호 시전집 : 시>(솔, 2022)이 출판되었습니다.

‘영목’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 가장 남단 바닷가에 있는 항구입니다. 지금은 다리가 연결되어 안면도가 더 이상 섬이 아니지만, 옛날에는 일몰이 아름다운 서해 바다, 그중에서도 섬의 가장 남단, 더는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영목항이었습니다. 시인의 표현을 빌면 그곳에 서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시인은 붉게 타는 일몰의 장관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 온 삶과 또 그 '삶의 일몰'을 되돌아보는 감상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무것도 몰랐던 어릴 적에는 ‘차라리, 집도 절도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시인은 운을 뗍니다. 그러다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나이가 되어서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었고, 또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서서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면서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그런 서늘한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듯도 합니다.

인의 삶을 살기로 작정을 하고 그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詩를 쓰고 싶었’고,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뜻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를 쓰고 싶었는데, 일몰을 마주하고 서서 보니 자신의 인생도 그저 쓸쓸하게 어두워져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제 돌아갈 날이 그리 많지 않으니 어렴풋이 뭔가가 보이는 것 같기는 한데 이미 일몰이 저리 타오르며 끝을 알리고 있다고 시인은 우울합니다.

러나,  붉은 노을이 그려놓은 어두워가는 환상적인 그 바다 위를 외롭게 날고 있는 한 마리 ‘갈매기’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켜,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을 걸어가리라, 그리고 어두워져갈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그 길 위에 서리라 결단하면서 시인은 이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기도 고양시 일산 정발산동 암센터 앞에 있는 남도 한식당인 ‘여자만’은 시인의 미망인 홍경화씨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그가 떠난 지 18년이 지났지만 문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윤 시인이 그의 시에서 노래했듯이,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을 꿈꾸며 살았기에 그런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늘은 34년을 근무한 학교를 마지막 출근하는 날입니다. 삶의 한 구간을 마무리하고 또 다른 구간을 시작하는 날 감상하기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널리 이름을 떨친 유명한 사람으로 살지는 못했지만,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그 길 위에 서리라 일몰을 바라보면서 결단했던 시인처럼, 한 직장에서의 정년이 그냥 ‘인생의 끝’이 아니라, ‘서늘한 경계에 서는’ 또는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또 다른 삶의 시작이어야 함을 다시한번 다짐하게 하는 시입니다. 이 아침, 여명이 밝아오는 북한산 앞에 서서 또 한 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읽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