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두부 / 사기 - 유병록

석전碩田,제임스 2022. 8. 10. 09:26

두부

- 유병록

아무래도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

따듯한 살갗 안쪽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곧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 같다

순간의 촉감으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부는 식어간다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한 것처럼 차분하게
차가워지는 가슴에
얹었던 손으로,
이미 견고해진 몸을 붙잡고
흔들던 손으로 두부를 만진다

지금은 없는 시간의 마지막을,
전해지지 않는 온기를 만져보는 것이다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

두부를 오래 만지면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느낌,
곧 떠날 영혼의 머뭇거림에 손을 얹는 느낌

이것은 지독한 감각,
다시 위독의 시간
나는 만지고 있다

사라진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리고 있다
  
- 계간 <詩로 여는 세상>(2011년 겨울호)에 발표
-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 2014)

* 감상 : 유병록 시인.

1982년 5월,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당시 심사위원들로부터 '시선의 깊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서둘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묘사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2014년 김준성문학상, 2018년 내일의 한국작가상,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1년에는 천상병시문학상과 노작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하였습니다.

집으로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 2014),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2020), 산문집 <안간힘>(2019), <그립소>(2021) 등을 출간했습니다. 농사짓고 소 키우는 전형적인 시골집에서 여러 동물들과 어울려서 성장한 유년 시절, 그리고 읍내로 이사를 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스무살 무렵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경기도 일산에서 글을 쓰고 책 만드는 편집자의 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난주 은평 뉴타운으로 이사를 온 후, 주말을 이용해 주변을 둘러보면서 재미난 음식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불광동 쪽으로 나 있는 좁은 1차선 도로가 하나 있는데,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 길을 이용하면 ‘불광동 기독교 수양관’에 이내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곳 주변은 그린벨트 땅에 주민들이 텃밭을 일구는 풍경이 어우러져 도심 속이지만 마치 먼 시골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인데 식당은 바로 그 인근에 있는 두부 전문 식당, <오두리 두부>입니다. 영업시간 내내 식당 안에 나훈아 노래를 은은하게 틀어 놓는 특징이 있는 식당입니다. 그 이유는,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장이 나훈아를 닮아, ‘불광동 나훈아’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겉모습이 닮아 있기도 하지만, 가수 나훈아의 매니아 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국산 콩으로 매일 새벽마다 손수 두부를 만들고, 그날 만든 준비된 재료가 떨어지면 후회 없이 영업을 종료하는 걸 원칙으로 하는, 독특한 식당 운영 철학(?)을 가지고 소신껏 일하는 주인을 알게 된 것입니다. 두부 황태전골, 두부 부침, 순두부 등 두부로 만든 음식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식당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두부를 맨손으로 만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인이 표현한 대로, 식어가는 두부의 느낌을 공감할 수 있는 시입니다. 시인은 따뜻했던 두부가 식어가는 모습을 통해서, 아련하게 그리운 사람이 죽어가는 위독한 상황을 비유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를 만지는 느낌을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것에 비유하며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느낌, / 곧 떠날 영혼의 머뭇거림에 손을 얹는 느낌 / 이것은 지독한 감각, / 다시 위독의 시간 / 나는 만지고 있다’ 위독하던 그 그리운 사람을 만졌던 그 느낌,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던 그 지독한 날의 기억을 ‘지금은 없는 시간의 마지막을, / 전해지지 않는 온기를 만져보는 것이다’라면서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연의 한 문장 - ‘사라진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리고 있다’- 은 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시적 화자의 처연한 슬픔에 공감하게 하는 동시에, ‘그때 그 순간의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따뜻한 회상의 순간으로 복원해내면서 ‘안간힘을 쓰며 이겨내려는 현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단 이후 산뜻한 감각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개성적인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는 평을 받고있는 유병록 시인의 또 다른 시 하나를 더 감상해보겠 습니다. 시인은 어린 아들을 잃은 개인적인 아픔이 있습니다. 어쩌면 아들을 잃은 아비의 비통한 마음, 가슴을 저미는 상실감과 고통이 그의 시 세계 저간에 흐르는 에너지가 된 듯합니다. 아들을 먼저 보낼 때의 심정을 피력한 글이 그의 산문집 <안간힘>에 실려 있는데, 그 일부분을 먼저 읽고 난 후에 이 시를 읽으면 더 잘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아들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장소는 장례식장 앞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방긋 웃던 아들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저녁이었다. 아들은 온기를 잃고 장례식장 안에 누워 있었고, 나는 누나가 사 온 죽을 먹고 있었다. 그것은 치욕이었다. 아들을 잃고 무언가를 입에 넣는다는 게 치욕스러울 수 없었다. 그러나 뭐라도 먹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오늘 내일 해야 할 일이 많을 테니 뭐라도 먹고 힘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꾸역꾸역 죽을 입속에 넣었다.

죽을 먹고 나서는 끓어오르는 슬픔과 끓어 넘치는 치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때 담배 생각이 났다. 곁에 있던 매형에게 담배를 한 대 달라고 했다. 끊은 지 몇 년 된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중략) 그 거대한 슬픔이 담배 따위로 다소간이라도 줄어든다는 게, 그 거대한 슬픔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 담배의 힘을 빌린다는 게 치욕스러웠다. 그러나 연이어 담배를 피웠다. 참을 수가 없었다.

밤이 이슥해지고 나니, 주변에서 한숨이라도 자야 한다고 조언했다. 잠이라니. 아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잠을 자라니. 그러나 내일 아들을 화장하고 산에 뿌리려면 아빠가 한숨이라도 자고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장례식장 한구석에 눕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천장을 바라보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다가,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잔다는 게 당최 말이 되는가 생각했다. 치욕스러웠다.

새벽녘, 나는 구석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역시나 주변에서는 뭐라도 입에 넣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도저히 무엇을 먹을 자신이 없다고 말했지만, 결국 컵라면을 먹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라면을 먹지 않으다면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상황에서 배가 고파질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도 했다.(p. 17, 중략)

그렇다. 나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하루 반나절 동안 무려 세 끼를 챙겨 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치욕스럽다. 아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주변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한 끼도 먹지 않고 식음을 전폐했다면 어땠을까. 치욕스러움이야 덜했겠다. 그러나 그 거대한 슬픔을 내보일 힘을 끝내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치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p.20)]

사기

- 유병록

믿을 수 없겠지
모든 게 사기라는 걸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니까, 밥을 꼭꼭 씹어 먹으니까, 말끔한 모습이니까

아무도 눈치챌 수 없지

내가
웃으니까,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니까,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일어나니까

아무도 모르지

몇 번이나 인사를 연습하는 나를
솟구치는 울음을 밀어 넣기 위해 부지런히 밥을 삼키는 나를
잠들지 못하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나는 나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를
들키고 싶은 나를

아무도 모르지

나도 곧잘 잊어버리니까
모두 사기라는 걸

-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2020),

훈아 컨서트에 갔다가, ‘저 유명하고 능력있는 사람도 노래 한 곡을 준비하기 위해서 저렇게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무지렁이 같은 나는 그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동안 살아 왔구나’라는 자각을 했다는 불광동 나훈아는, 그날 이후 완전히 달라진 태도와 마음으로 식당 일에 임했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최고의 두부 요리로 승부해 보자는 ‘삶의 각오’말입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먹고 자고 쉴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자신의 존재’를 치욕스럽게 느껴, 모든 게 ‘사기’라고 이름붙여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돌아보는 시로 세상에 한 발짝 다가서려는 시인과 오두리 두부 식당 사장은 어딘가 서로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영부영 적당히 살지 않겠다는,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에 치욕스러움을 느끼는 ‘의분(義憤)’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