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쑥부쟁이 꽃밭에 앉아 - 진란

석전碩田,제임스 2022. 7. 21. 10:36

쑥부쟁이 꽃밭에 앉아

- 진란

어느 결에 사라진 쇄골 생각에
이제 다시는 그대와 숨 가쁜 연애도 못하겠다고
주름진 눈가 하얀 소금강을 그려놓고
여자는 늘 쇄골 생각, 그대는 쇄골 아래 숨골 생각
오늘은 어쩌자고 꽃을 바라보다가 쇄골 생각이네
촉촉한 살결이,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저 꽃잎
한때 보드라운 입술에 밀봉도 많았었다고
꽃등에가, 꿀벌이 왱왱거리는 한낮, 어쩌자고 나는
꽃의 쇄골 생각에 빠져 귀울림 낭자하던 그 한낮의 정사
홀로 낯 붉어지며 쑥부쟁이 쓰러진 꽃밭에 숨어
사라진 쇄골 생각, 골똘해지네

- 시집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시인동네, 2022) 

* 감상 : 진란 시인.

195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2002년 계간지 <주변인과 詩> 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공직생활을 하던 부친을 따라 전주 인근 여러 학교를 전학하며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대학에서 유아교육학을 전공하였고 병설 유치원에서 직장 생활을 하였습니다. 결혼 후 종교에 대한 관심이 있어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교회에서 교구장과 선교사로 오랫동안 봉사를 하였습니다. 2009년 이후, 월간 <우리詩> 편집교정위원으로, <문학과 사람> 기획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계간 <詩하늘> 속의 동인 <詩몰이>에서 시합평회를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집으로는 <혼자 노는 숲>(나무 아래서, 2011)과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시인동네, 2022)가 있습니다.
  
히 우리가 '들국화'라고 부르는데 실상은 식물도감에는 들국화라는 꽃은 없습니다. 어엿한 제 이름을 갖고 있는데 지금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있는 꽃들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에 등장하는 '쑥부쟁이'를 비롯해서 쑥부쟁이와 비슷한 '구절초', 그리고 '개미취'가 바로 그 꽃들입니다. 이들의 특징들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면 좀체 구별하기 힘든 국화과에 속하는 대표적인 '들국화'들입니다. 그래서 구절초와 쑥부쟁이, 개미취를 구별할 줄 알면 야생화 공부가 끝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실 정확하게 구별할 줄 아는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들국화'가 가을의 전령사라고 하지만 폭염이 시작되는 지금 쯤부터 산 능선과 들판 아무데나 피는 가장 흔한 꽃이 쑥부쟁이입니다. 우리 산야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야생화, 시인은 아마도 이 쑥부쟁이가 흐드러지게 피는 요즘 같은 계절이 되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낯 붉히는 자신만의 비밀이 하나 있는 듯합니다.

'어쩌자고 나는 꽃의 쇄골 생각에 빠져 / 귀울림 낭자하던 그 한낮의 정사 / 홀로 낯 붉어지며 쑥부쟁이 쓰러진 꽃밭에 숨어 / 사라진 쇄골 생각, 골똘해지네'

적한 외진 곳, 쑥부쟁이가 무엇인가에 의해 쓰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아득한 그 옛날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정사 장면이 떠 올랐습니다. 그 땐 나의 목선을 가냘프고 이쁘게 만들어 준 '쇄골'이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젊었지만, 이제는 그 쇄골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대와 숨가쁜 연애도 못하겠다고 / 주름진 눈가 하얀 소금강을 그려놓고' 그저 옛날의 쇄골 생각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촉촉한 살결' '보드라운 입술'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쇄골을 가졌던 시인이었지만 꽃등에와 꿀벌들이 쉴새없이 지천으로 이쁘게 피어있는 쑥부쟁이 꽃 깊숙히 빨대를 꽂느라 왱왱거리는 광경에 '어쩌자고' 한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를 읽고 어느 시인은 감상문을 이렇게 표현했더군요. "어느 결에 사라진 쇄골. 그리고 주름진 눈가. 이제 쇄골에서 숨골로 올라가는, 숨골에서 우주를 향해 주파수를 보내는 나이"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인생의 덧없음과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는 시입니다.

제 늦은 오후, 친구의 모친께서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친구로부터 직접 전해들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살아생전 부부동반으로 만나 서로 가깝게 교분을 나누시며 의지하셨는데, 그동안 유일하게 생존하고 계셨던 친구의 어머니가 결국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듣고 옛 생각이 났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의 집에 가끔 놀러가면 아들의 친구들이 왔다고 참 다정스럽게 대해주셨던 어머니, 그리고 부모님들과 관련되었던 소소한 일들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부모님 세대의 마지막 주자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제는 우리들이 직장을 그만 두는 '정년퇴임'을 코 앞에 두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저 간 부모 세대를 생각하며 오늘따라 생각이 골똘해지는 이 아침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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