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엑스트라 - 최호일

석전碩田,제임스 2022. 7. 6. 06:53

엑스트라

- 최호일

이 한여름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우리는 웃는다
여름날 당신의 입술과 내 손가락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
혀가 혀를 빨아 먹으며
바위 사이에서 커다란 뱀과 여자와 허벅지가 튀어나올 때
주인공은 홀로 용감하다
대기 속에는 진짜 총알이 들어 있고 

여섯시에 총을 맞아야하므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내일은 지퍼가 열린 줄 모르고 들고 다니는 트렁크 속에서
가면과 시체가 쏟아질 것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영화처럼
저녁이 오고
화면엔 보이지 않지만 쓰러진 술잔이 있다
그것이 어두운 소리로 굴러떨어져 강가에 닿을 무렵
겨울이 와야 한다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내 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 <문장웹진>(9월호)(2010.8), 시집 <바나나의 웃음>(중앙북스, 2014)

* 감상 : 최호일 시인.

1958년 충남 서천군 한산에서 태어났습니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시 ‘아쿠아리우스’가 당선되었으나, 2004년 이미 지역의 시 동인 李모 후배가 시인 몰래 당선작이 된 시를 ‘한국수자원공사 문학공모전’에 제출해서 수상하는 바람에, 중복 투고가 뒤늦게 밝혀져 안타깝게도 시상까지 다 마친 후에 당선이 취소되는 엄청난 헤프닝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이 시가 시인이 쓴 시라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이었지요. 그러나 그 후 탄탄한 그의 시적 내공은 2009년 <현대시학>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입증되었고, 정식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첫 시집 <바나나의 웃음>(중앙북스, 2014)이 있습니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당시 그가 쓴 당선 소감문을 전재해 보겠습니다.

‘십년 전쯤, 생업을 등지고 시에 빠져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무성 영화처럼 돌아간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고 나는 살짝 맛이 가 있었다. 과도한 의욕이, 편견과 오만이, 그리고 화려한 궁핍이 내 유일한 의상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보이거나 천재였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지쳐있었다.

어림도 없을 줄 알았던 당선소식을 듣고는, 아이들은 상금의 용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아내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방에 가서 운다. 나는 실없는 장난 전화를 받은 것처럼 담담했다. 가소롭다.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누군가 말했다. 시인은 돈을 멀리해야 하고, 살이 쪄서도 안 되며, 오로지 고독과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심한(?)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인의 양식은 과연 고독과 이슬일까? 하지만 나는 어느덧 돈의 단맛을 아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영악해져 있다. 그러나 등이 따뜻해져 갈수록 마음은 여전히 춥거나 허기를 느낀다. 그리하여 시여! 시인이여! 절벽까지 나를 안내해 다오. 출구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작심을 하고 쓴 시는 모조리 밀려나고, 옆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쓴 시가 당선이 되어 적지 않게 놀랐다. 힘을 뺐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는 앞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시를 써 봐야겠다. 아무튼, 내가 어쩌자고 이곳으로 다시 기어들어 왔는지 통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약주나 한잔 부어 드리러 산에 가야겠다. 격려해 준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홍일표 시인, 날시 동인,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 지금은 눈에 덮여 있을 추동공원의 벤치에게 참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친 김에 시 감상은 잠시 제쳐 두고 최호일 시인이 2009년 <현대시학>에서 신인 작품상에 당선되었을 때 쓴 그의 당선 소감문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장암동 낙지 집에서 낙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낙지를 젓가락으로 집어야 하는데 전화가 온 것이다. 저를 아시는지요? 네, 현대시학이비다. 낙지가 타고 있는데 현대시학이란다. 낙지를 뒤집어야 하는데 왜 이제야 연락하는 건가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렇게 그것이 다시 내게 왔다. 이 봄은 작년에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래서 또 낯설게 기쁘고 두근거린다. 어디서 보았을까 내 시는......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런 시는........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처럼 시의 문 밖에서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시를 찢거나 태우고 먹고 마시고 토하고, 설거지할 때 뒤에서 끌어안기도 했다. 야속하고 이가 갈리는 시. 그것은 개처럼 나를 물어뜯거나 할퀴면서 놓아주지 않았다. 

개의 젖 같은 시!라고 말할 때 그가 나를 놓쳐 버린 것. 그래, 그만 나를 놓아주렴. 참 많이 아팠다. 

헐렁헐렁하고 싸가지 없는 시를 쓰고 싶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시를 쓰고 싶다. 그렇게 하려고 물을 부어놓고 내 시를 태우거나 그런 생각에 잠긴다. 잘 가라....내 시여! 현대시학에 응모할 때 한번 사용했던 ‘최해일’이라는 가명도 이제는 휴지통에 버린다.

정진규 선생님께서 축하한다고 다시 전화를 주셨다. 그 때 드디어 눈물이 났다. 낙지가 타고 있었는데........ 시를 쓰기를 300번쯤 때려치운 적이 있다. 그 때마다 300번쯤 너는 시를 써야 한다고 흔들어 주었던 홍일표 시인이 300번쯤 원망스럽게 고맙다. 시를 심사하는 일은 그 분들에게는 제2의 시 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므로 심사위원님들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

오늘은 하루 종일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손잡이가 달린 바람이다. 네가 좋아하는 부추김치 담가 놨다. 내게 돌아와라 詩야!

 개의 그의 당선 소감문을 읽으면 자신에게 운명처럼 다가 온 시를 벗어나지 못하여 몸부림 치는 한 사람 시인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시인을 심사위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최호일의 시를 만나면 무릎을 탁! 내리치게 하는 즐거움을 주는 시’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또 그의 시편들은 ‘가멸찬 상상력과 당돌한 언어에서 느껴지는 그 뭔가가 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습니다. 시단에 나오기까지 그의 내력을 이해하면 시어 하나 하나에서 그 결이 한결 더 다가옵니다. 

적 화자가 직접 엑스트라 역할을 했는지 아니면 제 삼자의 입장에서 관찰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는 ‘이 한여름에 / 두꺼운 옷을 껴입고’ 웃고 있는 엑스트라들을 언급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디 '엑스트라'란 '영화, 연극, 텔레비전 방송극 등에서, 군중이나 행인 따위의 단역으로 나오는 임시 고용 출연자'를 의미합니다. 주인공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뒷배경으로만 활용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는 역할'을 위한 엑스트라는 어찌 보면 서글픈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극중 이야기가 겨울이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지만 웃는 배경 역할을 해야하는 엑스트라, 그래서 마지막 행 ‘내 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문장은 이 시의 긴장감을 클라이막스로 끌어 올리는 시적 은유입니다. 그저 '대용품'일 뿐이라는 이 말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도 우리 스스로 주인공이라 여기고 살지만 '모두가 엑스트라로 살아가는 현실'을 인정하도록, 이 시를 읽고 있는 독자가 직접 내뱉는 독백처럼 들리게 하는 마력을 지닌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신나는 인생 극장 화면에선 그저 소품의 하나인 '가면과 시체'처럼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하지만, 보이지 않는 화면에선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는 엑스트라들의 신세는 마치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겨울이 와야 비로소 마무리될 것입니다.

시는 시의 세계에서 긴 엑스트라 생활을 끝내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홀로 용감'하게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시인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마치 자화상 같은 시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내 몸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엑스트라 같은 삶이 아니라, 대기 속에 있는 진짜 총알들을 용감하게 맞딱트리는 '주인공 시인'이 되겠다는 각오처럼 읽혀지기도 합니다. 시인의 건승을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