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턴을 하는 동안
- 강인한
좌회전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좌회전 신호가 없다,
지나친다.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붉은 신호의 비호 아래 유턴을 한다,
들어가지 못한 길목을 뒤늦게 찾아간다.
꽃을 기다리다가 잠시
바람결로 며칠 떠돌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목련이 한꺼번에 다 져 버렸다.
목련나무 둥치 아래 흰 깃털이 흙빛으로 누워 있다.
이번 세상에 만나지 못한 꽃
그대여, 그럼
다음 생에서 나는 문득 되돌아와야 하나?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이 생이 다 저물어 간다.
- <시로 여는 세상>(2010년 봄호, 2010.1.16.)
- 시집 <강변북로> (시로 여는 세상, 2012년 9월)
* 감상 : 강인한 시인.
1944년 3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강동길.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67년 5월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부문에 당선되기도 하였습니다.
1966년 첫 시집 <이상기후>(가림출판사, 1966) 이후, <불꽃>(대흥출판사, 1974), <전라도 시인>테멘기획,1982), <우리나라 날씨>(나남, 1986), <칼레의 시민들>(문학세계사, 1992), <황홀한 물살>(창작과비평사, 1999), <푸른 심연>(고요아침, 2005), <입술>(시학, 2009), <강변북로>(시로여는세상, 2012), <튤립이 보내온 것들>(시와시학, 2017), <두 개의 인상>(현대시학사, 2020) 등 11집의 시집과 시선집 <어린 신에게>(문학동네, 1998), <강인한 대표시 100선, 신들의 놀이터>(2015), 그리고 시 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2002)가 있습니다.
고교 재학 시절 신석정 시인을 은사로 두었으며 대학 졸업 후 37년 간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지난 2004년 2월,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를 끝으로 명예 퇴직하였습니다. 1982년 전남문학상, 2010년 한국시인협회상, 2017년 시와시학상 시인상, 2020년 제6회 전봉건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2002년부터 현재까지 인터넷 다음 카페 <푸른 시의 방>(http://cafe.daum.net/poemory)을 혼자서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현대시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운전을 해 본 사람이면 이런 상황을 백번 공감할 것입니다. 내가 들어가야 하는 길이 길 왼쪽에 있는 골목길인데 정작 들어가려고 하니, 그곳에는 아예 좌회전 신호가 없을뿐더러, 불법으로라도 들어갈 수 없게 길 한가운데 차단 막대까지 박혀있어 난감한 상황. 그 길로 들어가려면 할 수 없이 한참을 더 직진했다가 용케도 유턴하는 장소가 있으면 그곳에서 돌아오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예기치 않는 ‘유턴 상황’을 겪으면서 시인은 제 때에 그 길에 접어들지 못하고 한 참을 돌아서 가야하는 상황을 마치 ‘인생길에서 운명적으로 만나야 했던 그 꽃’을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번 세상에 만나지 못한 꽃 / 그대여, 그럼 / 다음 생에서 나는 문득 되돌아와야 하나? /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 이 생이 다 저물어 간다.’
우리가 사는 삶이 자기가 계획한대로 모두 흘러간다면야 이런 시가 어찌 공감이 갈 수 있을까요. 내가 계획한대로만 삶의 길이 흘러가지 않으니, 본의 아니게 한참을 더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뒤늦게 도착해 보니 이미 ‘이 생이 다 저물어 간다’는 표현이 마음으로 다가옵니다. 유턴을 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인이 참 많은 생각을 했듯이, 이 시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달려온 지난 삶의 여정을 다시 되돌아보게 됩니다. 곧바로 왼쪽 골목길로 접어들었으면 지금쯤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매년 봄이면 멀리 남녘에서 봄 꽃 소식이 들려옵니다. '산수유, 매화꽃이 피었다'느니 '유채꽃, 동백꽃이 피었다'느니 요란한 봄꽃 소식에 서둘러 그들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어영부영 ‘바람결로 며칠 떠돌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 목련이 한꺼번에 다 져 버렸다. / 목련나무 둥치 아래 흰 깃털이 흙빛으로 누워 있다.’는 표현은 해마다 봄이면 겪는 일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조차도 내 맘대로 쓰지 못하고, 유턴하느라 시간을 지체해야 하는 현실 말입니다.
저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2010년 봄, 교회에서 장로로 피택을 받고 담담한 심정으로 각오를 다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 혼자만 읽을 수 있는 공간에 넣어 둔 글인데, 이 시를 읽고 갑자기 그 때 내 뜻과는 달리 유턴을 해야 했던 '그 일'이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열 두 해가 지났지만 글을 읽으면서 그 때의 그 뜨거운 헌신과 각오, 다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턴을 하고 돌아와서 보니 지금은 그 애초의 골목이 아닌 다른 새로운 길로 들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어쩌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다음 생애까지 가야할 필요 없이, 비록 애초에 생각했던 그 길은 아닐지라도 '지금 여기'서 더 멋진 나만의 꽃을 피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퇴직 후 시인이 뒤늦게나마 인터넷 온라인 공간에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참다운 시는 어떤 것인지 함께 나누며 화분에 물을 주듯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좋은 시와 시인을 가려내고, 또 눈 밝은 평론을 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최근, 그가 카페에 올린 ‘본명과 필명, 그리고 호(號)’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자신의 필명인 ‘강인한(姜寅翰)’에 대해서 설명하는 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오늘 글을 마무리합니다. 그의 필명대로, 굳세고 강직한 자세로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에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더욱 매진하길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내 본명은 강동길(姜東吉)이다. 주민등록증에 지금도 어엿한 본명이다. 초등학교 때 내 주위의 아이들이 만화 ‘홍길동’을 익히 알고 나선지 ‘강길동(강길똥)’이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필명을 스스로 지어 쓴 건 1964년의 대학 시절. 경북대학교 학보사에서 공모한 전국대학생 현상문예에 졸시 「사자 공화국(死者共和國)」이 김춘수 선생이 뽑아준 당선작이었고, 강인한(姜寅翰)은 그 무렵 갓 지어낸 필명이었다. 이틀 동안을 옥편 끼고 끙끙거려 지은 이름이다. 그 전해에 청구대학의 현상공모에 소설과 시가 입선하였던 이름은 본명 강동길이었고.
강인한의 인(寅). 천간지지에서 인(寅)은 지지의 셋째로, ‘호랑이’를 상징한다. 그리고 인시(寅時)는 ‘새벽(3시~5시)’의 시간을 말한다. 한(翰)은 ‘날개, 편지(글), 선비’ 등의 뜻이 들어 있는 한자다. 이 두 글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인한(寅翰)의 이미지들 - 호랑이 날개, 호랑이의 편지(글), 새벽의 날개, 새벽의 글, 새벽 선비 등 - 이 나는 좋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글로만 쓰는 경향이 두드러져 ‘강인한’이란 이름은 바로 ‘굳세고 질긴(强靭)’이란 의미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한글로만 읽히는 내 이름을 약간 코믹하게 느끼는 것 같다. 으레 이름 탓도 있어서 강인한 선생님 시는 강직하게 느껴진다나.]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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