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 김환식
윤오월
초순인데
모내기 끝난 들판이
야단법석입니다
다잡을 사연들도 없이
윗마을
아랫마을
청개구리들 다 모여 앉아
갑론을박 의견만 분분합니다
더러는
못난 내 흉도 보고
더러는 지들 잘난 체도 하고
또 더러는
가당찮은 입씨름으로
밤 깊은 줄도 잊고 소란을 피웁니다
그런 풍광을 추억하며
나는
좁은 논둑길에 넋 놓고 앉아
생각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아득히
캄캄한 무논만 바라봅니다
- 시집 <생각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황금알, 2022)
* 감상 : 김환식 시인.
1958년 경북 영천시 고경읍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북공고 야간부를 졸업하고 포항제철 공사 현장에서 첫 직장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밤에는 포항실업전문학교(지금의 포항1대학)를 다니면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만학도(晩學徒)였습니다. 1982년, 스물 세 살 되던 해 경상북도 9급 공채시험에서 900명 지원자 중 1등으로 합격하여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포항시 죽장면 사무소, 영일군청, 영천군청 등에서 기술직 공무원으로 일하다 1991년 1월, 공직 생활을 접었습니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방송통신대 학생으로서 계속 공부하였고, 경북 산업대 경영학과로 편입했습니다. 마흔 네 살이 되던 해인 2002년에는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인사관리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공무원을 그만 두고 그 분야의 컨설팅 업체를 운영했던 그는 30대 후반인 1995년, 자동차 부품업체인 ㈜한중엔시에스를 창업하여 대표이사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연 매출이 300억 원이 넘을 정도의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2020년부터는 중소 벤처기업 전문 주식시장인 (사)코넥스협회 회장도 맡고 있습니다.
1995년, 계간지인 <시와반시>에 시 한 편을 발표하여 세상에 시인으로서의 이름을 낸 나이가 서른일곱, 그의 표현대로 그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은 거북하기 그지없을지 몰라도, 그 이후 그는 꾸준히 시집을 내면서 시작(詩作)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시집 <산다는 것>(1995)을 시작으로 <낯선 손 하나를 뒤집어 놓고>(현대시문학사, 2005), <낙인>(시와반시, 2007), <물결무늬>(시와반시, 2009), <천년의 감옥>(천년의 시작, 2011), <버팀목>(황금알, 2015), <참 고약한 버릇>(지혜, 2013), <붉은 혀>(지혜, 2017), <생각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황금알, 2022) 등 아홉 권의 시집을 상재하였습니다. 2021년에는 '비밀번호'라는 시로 <문학청춘>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시인시대>와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요즘 이맘때의 농촌 풍경만 보면 옛 추억이 고스란히 소환되는 ‘천상 촌놈’인 시인 한 사람을 만나게 합니다.
모내기를 다 끝낼 무렵인 지금의 농촌 풍경은 일 년 중 가장 한가롭고 목가적(牧歌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밤꽃 냄새가 진동하고, 감자 꽃,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 그리고 먼 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한가로운 농촌의 모습. 해 그림자가 드리우는 저녁나절, 모내기가 끝나 찰랑 찰랑 물 댄 논에서 울기 시작하는 개구리들의 합창은 시골 출신 시인에게는 아마도 남다른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었나 봅니다.
앞서 간략하게 소개한 그의 삶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삶은 특히 남달랐습니다. 가난한 시골 농부의 3남 1녀 아들로 태어나, 주경야독으로 공무원이 되었고 또 그마저도 중간에 그만두고 자동차 부품회사의 CEO가 되기까지 치열했던 삶의 현장에서, 생각도 많았고 또 느끼는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 경쟁에서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데, 한가로운 논둑길을 걷다가 들려오는 개구리 합창 소리에 불현 듯 옛 추억이 소환된 것입니다.
‘윗마을 / 아랫마을 /청개구리들 다 모여 앉아 / 갑론을박 의견만 분분합니다 / 더러는/ 못난 내 흉도 보고 / 더러는 지들 잘난 체도 하고 / 또 더러는 / 가당찮은 입씨름으로 / 밤 깊은 줄도 잊고 소란을 피’우는 모습은 어릴적 그가 겪었던 추억의 한 장면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지금까지 자신이 달려 온 치열했던 삶의 순간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소란함 가운데서도 그는 늘 ‘좁은 논둑길에 넋 놓고 앉아 /생각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 아득히 / 캄캄한 무논만 바라’봤다고 고백했듯이, 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간증이기도 합니다. 그가 자신의 어느 시집에서 고백했던 것과 같이 자신을 지탱하게 해 주는 힘이자 삶의 동기는 바로 시였습니다. ‘저에게 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시를 쓰는 작업은 새로운 것을 창작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너무나 많다’면서 그는 ‘시를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연마할 수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생각이 어둑어둑해지는 것, 바로 시인이 시끄러운 세상 가운데서도 앞으로 전진할 수 있게 했던 힘의 원천이었다는 말입니다.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서 그가 유일하게 안식하며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이 바로 ‘시’였다는 진솔한 고백이 멋집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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