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을 때
- 박완서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물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 215~216, (현대문학, 2010)
* 감상 : 박완서 소설가.
1931년 10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7살 때 서울로 이주하여 1944년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50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여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숙부와 오빠를 잃는 등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1951년 학업을 중단하였습니다. 1984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 학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40대에 접어든 1970년, 1남 4녀 자녀 다섯을 둔 전업주부로서 <여성동아>에 장편 소설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2011년 1월 22일, 지병인 담낭암으로 투병하다가 79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살아온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를 그녀만의 독특한 어법, 즉 ‘생활어법의 살아있는 문장'으로 독자들과 소통한 작가로 평을 받고 있습니다.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전쟁 중에 죽은 오빠와 숙부, 또 먼저 죽은 남편과 아들을 보내면서 겪은 개인적인 아픔들은 그녀 작품의 자양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입니다 - ‘쓰다 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엄청난 경험들이 자신의 소설과 수필에서 그대로 활용되어 살아있는 문장으로 재탄생된 것입니다.
작품집으로 <나목>(여성동아, 1970),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여성동아, 1972), <지렁이 울음소리>(신동아, 1973),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일지사, 1976), <휘청거리는 오후>(창작과 비평사, 1977), <목마른 계절>(수문서관, 1978), <욕망의 응달>(수문서관, 1979), <자전거 도둑>(마음산책, 1979, 동화집), <살아 있는 날의 시작>(전예원, 1980), <엄마의 말뚝>(일월서각, 1982),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세계사, 1983), <그 가을의 사흘동안>(나남, 1985), <도시의 흉년>(문학사상사, 1989), <미망>(문학사상사, 1990),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닷컴, 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출판, 1995), <아주 오래된 농담>(실천문학사, 2000), <그 남자네 집>(현대문학, 2004), <친절한 복희씨>(문학과지성사, 2008), <세 가지 소원>(마음산책, 2009),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2010), <세상에 예쁜 것>(마음산책, 2012, 유고집) 등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글은 박완서 작가가 평소 자신이 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술회한 내용입니다. 그가 작고하기 1년 전, 그녀의 마지막 저서인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산문이지만,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시를 사랑하고 또 시를 읽으며 행복해하는 순수한 마음이 전달되어져오는 문장입니다.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애송시 100편 1, 2>(민음사, 정끝별 해설, 권신아 그림, 2008)은 신문에 연재될 당시 아침에 그것을 받아 읽을 때의 행복감이 생각나서 얼른 샀다. 시집 표지가 이렇게 예쁘거나 야해도 되는 걸까, 고독하고 높은 정신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놓아도 되는 걸까, 염려도 되었지만 그 두 권의 책은 살 때도 행복했지만, 다시 읽어도, 아무 데나 읽어도 내 정신도 조금은 깊고 높아지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본다. 다시 읽어도 거듭해 읽을수록 더 좋아지는 건 좋은 시만이 줄 수 있는 큰 복인 것 같다. 멋모르고 그냥 느낌으로 좋아했던 난해한 시에 뛰어난 시인들의 웅숭깊고 친절한 해설이 붙은 것도 금상첨화였다.]
오늘 우리가 읽은 글 바로 앞 부분에 그녀가 소설가로서 시를 얼마나 사랑하고 또 좋아했는지를 밝힌 부분을 그대로 옮겨와 봤습니다. 살만하고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자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는 대목을 읽으면 그녀가 생의 마지막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을 했는지 엿보입니다.
지금 저는 재직 중에 마지막 출장으로 협의회 행사를 참석하기 위해 멀리 제주도에 와 있습니다. 귤 꽃 향기가 진동하고 또 청보리가 무르익어가는 이곳 제주에서 감상할 시로 어떤 게 좋을까 검색하다가, 박완서 선생님의 ‘시 사랑 마음이 듬뿍 묻어 있는 이 문장'을 함께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선택했습니다.
나이 들어 갈수록 그녀의 표현대로 ‘고독하고 높은 정신’인 시를 가까이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적어도 박완서 그녀처럼 실패한 인생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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