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을 때 - 박완서

석전碩田,제임스 2022. 5. 18. 06:19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을 때


- 박완서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물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 215~216, (현대문학, 2010)

* 감상 : 박완서 소설가.

1931년 10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7살 때 서울로 이주하여 1944년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50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여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숙부와 오빠를 잃는 등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1951년 학업을 중단하였습니다. 1984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 학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40대에 접어든 1970년, 1남 4녀 자녀 다섯을 둔 전업주부로서 <여성동아>에 장편 소설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2011년 1월 22일, 지병인 담낭암으로 투병하다가 79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완서 작가는 자신의 살아온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를 그녀만의 독특한 어법, 즉 ‘생활어법의 살아있는 문장'으로 독자들과 소통한 작가로 평을 받고 있습니다.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전쟁 중에 죽은 오빠와 숙부, 또 먼저 죽은 남편과 아들을 보내면서 겪은 개인적인 아픔들은 그녀 작품의 자양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입니다 - ‘쓰다 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엄청난 경험들이 자신의 소설과 수필에서 그대로 활용되어 살아있는 문장으로 재탄생된 것입니다.

품집으로 <나목>(여성동아, 1970),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여성동아, 1972), <지렁이 울음소리>(신동아, 1973),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일지사, 1976), <휘청거리는 오후>(창작과 비평사, 1977), <목마른 계절>(수문서관, 1978), <욕망의 응달>(수문서관, 1979), <자전거 도둑>(마음산책, 1979, 동화집), <살아 있는 날의 시작>(전예원, 1980), <엄마의 말뚝>(일월서각, 1982),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세계사, 1983), <그 가을의 사흘동안>(나남, 1985), <도시의 흉년>(문학사상사, 1989), <미망>(문학사상사, 1990),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닷컴, 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출판, 1995), <아주 오래된 농담>(실천문학사, 2000), <그 남자네 집>(현대문학, 2004), <친절한 복희씨>(문학과지성사, 2008), <세 가지 소원>(마음산책, 2009),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2010), <세상에 예쁜 것>(마음산책, 2012, 유고집) 등이 있습니다.

늘 읽은 글은 박완서 작가가 평소 자신이 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술회한 내용입니다. 그가 작고하기 1년 전, 그녀의 마지막 저서인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산문이지만,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시를 사랑하고 또 시를 읽으며 행복해하는 순수한 마음이 전달되어져오는 문장입니다.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애송시 100편 1, 2>(민음사, 정끝별 해설, 권신아 그림, 2008)은 신문에 연재될 당시 아침에 그것을 받아 읽을 때의 행복감이 생각나서 얼른 샀다. 시집 표지가 이렇게 예쁘거나 야해도 되는 걸까, 고독하고 높은 정신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놓아도 되는 걸까, 염려도 되었지만 그 두 권의 책은 살 때도 행복했지만, 다시 읽어도, 아무 데나 읽어도 내 정신도 조금은 깊고 높아지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본다. 다시 읽어도 거듭해 읽을수록 더 좋아지는 건 좋은 시만이 줄 수 있는 큰 복인 것 같다. 멋모르고 그냥 느낌으로 좋아했던 난해한 시에 뛰어난 시인들의 웅숭깊고 친절한 해설이 붙은 것도 금상첨화였다.]

늘 우리가 읽은 글 바로 앞 부분에 그녀가 소설가로서 시를 얼마나 사랑하고 또 좋아했는지를 밝힌 부분을 그대로 옮겨와 봤습니다. 살만하고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자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는 대목을 읽으면 그녀가 생의 마지막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을 했는지 엿보입니다.

금 저는 재직 중에 마지막 출장으로 협의회 행사를 참석하기 위해 멀리 제주도에 와 있습니다. 귤 꽃 향기가 진동하고 또 청보리가 무르익어가는 이곳 제주에서 감상할 시로 어떤 게 좋을까 검색하다가, 박완서 선생님의 ‘시 사랑 마음이 듬뿍 묻어 있는 이 문장'을 함께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선택했습니다.

이 들어 갈수록 그녀의 표현대로 ‘고독하고 높은 정신’인 시를 가까이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적어도 박완서 그녀처럼 실패한 인생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