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서울의 게르 - 최금녀

석전碩田,제임스 2022. 5. 11. 06:02

서울의 게르

- 최금녀

게르가 허물어지고 있어요 쫓겨나는 유목민들이지요 재개발을 반대해요 사막을 반대해요 모래바람을 반대해요 구멍을 반대해요 애들이 담장에 찰싹 붙어 담배질하는 여길 너무 좋아해요 깡통으로 축구를 해요 깡통구좌가 바로 이것이에요 저기 있는 허공 캄캄하지요 모래뿐인 저 구멍 속을 들여다봐요

저 엄숙하고 친절한 것들, 내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하는 것들, 살아 숨 쉬는 것조차 계량하는 것들, 고요하게 눈 부릅뜨고 내 사소하고 미약한 삶의 질량까지, 부끄러울까, 내 이름자 쓰고 봉함

사막을 반대해요
재개발을 반대해요

- 시집 <기둥들은 모두 새가 되었다>(한국문연, 2022. 4월)

* 감상 : 최금녀 시인.

1942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서 월남하였습니다. 1962년 <자유문학>에 단편소설 ‘실어기’가 입선하여 소설로 등단하였습니다. 대한일보, 서울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같은 신문사의 정치부 기자였던 신경식 전 국회의원과 사내 연애 끝에 결혼, 오랫동안 정치인의 아내로 살았습니다. 1998년부터 시 창작을 시작한 후 2000년 <문예운동>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들꽃은 홀로 피어라>(정은출판, 2000), <가본 적 없는 길에 서서>(한국문화사, 2001), <내 몸에 집을 짓는다>(문예운동, 2004), <저 분홍빛 손들>(문학아카데미, 2006, 영어시집), <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책만드는집, 2013), < 길 위에 시간을 묻다>(문학세계사, 2012), <큐피드의 독화살>(2017), <기둥들은 모두 새가 되었다>(한국문연, 2022. 4월) 등이 있으며, 활판인쇄 시선집으로 <한 줄, 혹은 두 줄>(시월, 2015)이 있습니다.

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문학의 집 이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국제펜문학상, 현대시인상, 미네르바 작품상, 서울언론인클럽 언론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상, 충청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바움문학상,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금녀 시인이 자신을 표현한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면, 스스로를 ‘기생이 못된 선무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무당 하루라도 날춤을 추지 않으면 / 아쟁이, 대금소리에 삭신이 아프고 저려서 / 색색이 옷 차려입고 신바람을 맞으며 / 동서남북 발길 안 닿는 데 없다’고 고백하듯, 늦깎이 시인으로서 이미 시집을 여러 권을 내고 또 문단의 중책들을 다양하게 섭렵할 정도로 열성이 대단한 시인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지난 달 펴낸 그녀의 시집에 실린 따끈한 따끈한 시입니다. ‘재개발’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하루아침에 정들었던 집들이 없어지고 마천루 아파트 단지로 변해가는 작금의 서울 풍경을 바라보면서 한탄스럽게 이런 재개발은 제발 그만 멈추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는 시입니다. 정다운 골목이 있고 아이들이 그 골목에서 깡통 차며 놀던 동네가 어느 날 ‘재건축을 축하는 플래카드’가 붙기 시작하면서 살벌하게 변해 갑니다. 재개발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개발이 되면 일터가 없어지니 이대로가 더 좋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두 패로 나눠져서 서로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하며 싸우는 모습이 서글픕니다.

‘게르’는 몽골 초원에서 볼 수 있는 유목민들의 이동식 천막을 말합니다. 시인이 굳이 ‘집’이라는 단어 대신에 ‘게르’를 사용한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아득한 마음의 고향인 푸른 초원 위에 있는 게르를 소환해 냄으로써 ‘살아 숨 쉬는 것조차 계량하는 것들, 고요하게 눈 부릅뜨고 내 사소하고 미약한 삶의 질량까지’ 감시당해야 하는 숨 막히는 도시의 사막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담긴 표현은 아닐까 싶습니다.

1974년인 중학교 2학년 말,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서울에 살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49년여 동안 저의 ‘서울의 게르‘ 변천사는 이러합니다.

울 살이 첫 해엔 성동구 하왕십리 산 1038번지 일대의 달동네에 살았던 고모님 집이었습니다. 대가족이 함께 살았고 또 그 와중에 딸 부자였던 시골 출신 목수 가족이 작은 셋방에 모여 사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서민들의 게르였지요.

1년 후, 고등학생이 되면서 시골에서 올라와 합류한 누님들과 같이 살았던 집이 나의 고등학교가 가까웠던 미아 삼거리 부근의 삼양동 달동네 전셋집이었습니다. 남동생을 뒷바라지 하라는 부모님의 엄명(?)을 받고 상경하였던 두 누님은 직장을 다니면서 세 남매가 평온하게 지내다, 군대에서 제대한 형이 합류하면서 옮긴 곳이 목동이었습니다. 당시 등촌동 도시가스 맞은편은 온통 호박밭과 고추밭이었고, 그 언덕 너머에 단독주택지가 막 개발되고 있던 때였지요. 그 단독 주택의 지층에 방이 두 칸이면서 주인 세대와는 완전히 분리된 새 집은, 네 명의 촌 놈들이 함께 살기에는 최고의 게르였다고나 할까요. 비록 그곳에서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까지 등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반면에 누님들이 출근하는 회사는 훨씬 가까워졌지요. 이곳에서 네 형제자매가 함께 살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은, 우리 형제들만 아는 비밀이 되어 아직까지도 아릿한 아픈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후, 농촌을 떠나면 삶의 뿌리가 뽑혀 질식할 것 같아 이농(離農)을 한사코 반대하셨던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어머니가 시골의 전답을 다 팔아 당당히 서울로 입성하여 마련했던 게르가, 서울 연희동 산동네에 있던 작은 중산층 아파트였습니다. 서울에서 부촌(富村)으로 알려 진 연희동에 우리에게 적합한 게르가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빈부의 격차가 확연한 동네에서 뿌리를 내리고 온 가족이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하나 둘 결혼을 하면서 분가할 수 있었으니 더 없이 복된 보금자리 게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연희동 104고지 바로 옆 산동네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부촌 연희동의 근사한 집들은, 나도 언젠가는 저런 집에서 살아보면 좋겠다는 소망이자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면서 살고 있던 곳이 점점 좁아지자 드디어 연희동의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늘 옮기고 싶었던 산 아래 부자동네 '연희동'은 아니지만, ‘그 연희동의 남쪽’에 위치한 옆 동네라 해서 이름 붙여진 ‘연남동(延南洞)’으로 옮겼던 해가 1996년,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한번 석탄을 실은 화물 열차가 지나갈 때면 온 동네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던 연남동은 서울에서 가장 핫한 지금과는 달리 당시엔 후진 동네 중의 한 군데였습니다. 우기철인 여름이면 지대가 낮아 물에 잠기는 것도 염려해야 했고, 또 철길이 두 군데나 있어 소음이 많은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각종 유실수가 자라는 작은 마당이 있는 2층 단독주택은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님을 모시기에는 최고의 ‘게르’였습니다.

마 전, 서울에 처음 왔을 때 살았던 왕십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둘러보러 갔다가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모릅니다. 유리 공장이 있던 곳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아기자기 상점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게 되고 그곳에서부터 산모퉁이 왼쪽 골목길을 한 참 오르면 있던 집을 찾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찾았는데, 그곳에는 골목길도, 유리공장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예 지도마저 바뀌었을 정도로,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내친 김에 미아리 삼양동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서 달려가 봤으나 그곳도 변해 있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조차도 모를 정도였지요. 대형 백화점이 들어선 삼양동 달동네는 지형이 변한 정도가 아니라 이곳이 그곳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도 완전히 딴 세상이었습니다. 어느 날 늦게 일어난 우리들이 인기척이 없자 주인아주머니께서 ‘어찌 오늘은 모두가 이리 늦나?’ 물어본 그 정겨운 호기심이 아니었다면, 연탄가스로 죽을 뻔한 사고를 면할 수 없었던 그 ‘삼양동 게르’는, 이제는 그저 추억 속에서만 있는 장소가 되었다는 게 슬픈 일입니다. 물론, 목동의 그 고급스러웠던 단독주택 단지도 지금은 볼썽사나운 다세대 주택들이 꽉 들어찬 이상하고 삭막한 동네가 되고 말았더군요.

난 주말에, 그동안 정들었던 ‘연남동 게르’를 떠나 은평 뉴타운으로 가는 큰 결정을 하였습니다. 8월 말 정년을 앞두고 해야 할 숙제 중 하나가 젊은이들로 넘쳐 나는 이곳 연남동을 떠나 조금은 한적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었는데,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모든 일들이 결정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을 떠나 멀리 강화쯤에서 은퇴 후 삶을 보낼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서울 게르의 변천사를 마감하는 동네’로 서울을 벗어나지 않고 북한산 아래 공기 맑은 동네로 정한 셈입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연남동을 방문했을 때 내가 반평생을 살았던 집이 흔적도 없이 개발되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만, 집을 구입한 분이 집 내부를 둘러보지도 않고 매입한 걸 보면, 이 ‘게르’의 운명도 불 보듯 뻔한 것 같습니다. 정든 집이 조만간 개발되어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사막을 반대해요 / 재개발을 반대해요’ 절규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침 화사하게 피어 있는 찔레꽃에게 뜰을 내려서며 이런 아쉬운 대화를 건네 봅니다. ‘비록 이제 다시 볼 수 없겠지만 부디 해마다 이쁘게 피어 이 동네를 환히 밝혀다오’라고..... - 석전(碩田)

그동안 26년동안 살았던 정들었던 연남동 집...곧 우리가 떠나고 나면 이곳이 어떻게 변할지.......

찔레꽃이 화사하게 피어 향기를 발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