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아침
- 곽재구
강을 따라 걷다
사람과 이마를 부딪쳤다
그이도 머리를 숙여 걸어왔기 때문이다
먼 이국의 밤의 해변에서 쏟아지던 유성우가
서로 부딪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던 순간이 있었다
충돌은 무지개보다 신비하다
그이가 손에서 놓친
시집을 들어 올렸을 때
선홍빛 뱀 딸기 하나 풀숲에서 수줍게 웃었다.
- 시집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2019)
* 감상 : 곽재구 시인.
1955년 10월(또 어떤 자료에는 1954년 1월), 광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광주제일고,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숭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사평역에서>(창비, 1983), <전장포 아리랑>(민음사, 1985), <한국의 연인들>(1986), <서울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 <참 맑은 물살>(창장과비평사, 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1999),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이가서, 2011), <와온 바다>(창작과비평사, 2012),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2019), <꽃으로 엮은 방패>(창비, 2021) 등이 있으며, 기행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1993), <곽재구의 포구기행>(2002), <곽재구의 예술기행>(2003), <길귀신의 노래>(2013),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해냄출판사, 2018), 그리고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파랑새어린이, 2003), <낙타풀의 사랑>(현대문학북스, 2001),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창비, 1996) 등을 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광주 서석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지만 이내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13년을 지내다가 2001년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되어 대학에서 강단을 지켰으며, 지난 2021년 2월 정년퇴임하였습니다. 그리고 2021년 8월 18일, 순천시 옥천동에 들어선 창작의 집 '정와(靜窩)'에 시민 대상 문학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운영자로 선정되어 입주하였습니다.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이며 1992년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하여 1995년 시집 <참 맑은 물살>을 펴냈습니다.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오늘은 6월이 가기 전에 이 계절에 딱 맞는 시 한 편을 감상하려고 합니다. 곽재구 시인을 ‘길 위의 시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시 이외에도 기행 산문을 참 많이 썼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도 강둑길을 걷는 중 일어난 에피소드를, 아련히 간직하고 있는 ‘6월’ 이맘때의 꿈이 고스란히 간직된 서정과 결부시켜 노래한 시입니다. 일 년 중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계절이 바로 6월, 그리고 아침 공기 마시며 아무도 가지 않은 강가를 걷는 산책길 위에서 노래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삼매경에 빠져 강 길을 걷다가 그만 ‘사람과 이마를 부딪쳤다 / 그이도 머리를 숙여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운을 뗍니다. 그 순간 문득, 아련한 추억 하나가 소환되어 떠오릅니다. ‘먼 이국의 밤의 해변에서 쏟아지던 유성우가 / 서로 부딪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던 순간’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부딪침이 유성우가 서로 부딪치는 것으로 형상화되면서, 꿈 많던 시절의 신비로운 추억을 소환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지개보다 더 신비’한 부딪침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 상대방도 시를 좋아하여 길을 걸으면서도 손에 시집을 갖고 다닐 정도였다니 그 충돌이 어찌 신비롭지 않았을까요. 그 묘한 충돌이 바로 6월, 그것도 이른 새벽 아침의 산책길이라니요.
뱀 딸기와 산딸기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딸기’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뱀 딸기는 먹지 못하는 딸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름에 ‘뱀’이라는 섬뜩한 단어가 있어 사람들은 선뜻 가까이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양과 색깔은 산딸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 선명하고 더 먹음직스럽게 보여 유혹적이라고나 할까요. 마치 에덴동산에서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또 보기도 좋았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처럼 뱀 딸기는 그 이미지가, ‘신비로운 금단의 영역에 있는 존재’를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시인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부딪친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서 소환되어 온 먼 이국의 밤 해변에서 시집을 들어 올리는 ‘그 누군가’와의 조우(遭遇), 그로 인해 되살아 난 욕망 등을 소재로 시인은 이 계절이 그에게 주는 묘한 시적 에너지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의 묘미는 시인이 길 옆 풀숲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선홍빛 뱀 딸기’가 지켜보고 있다는 마지막 한 행을 추가시킴으로써 결국 시 전체의 분위기를 묘한 신비감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6월 이맘때 계절이 주는 신비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꿈과 욕망이 있습니다. 비록 그 꿈이 ‘금단의 영역’에 속한 것일지라도 이 6월에는 모든 게 다 용납되는 계절인양, 6월 아침의 뱀 딸기는 오늘도 이슬을 머금고 청초하게 웃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6월이 달랑 하루만을 남겨 두고 있으니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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