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 안도현

석전碩田,제임스 2022. 8. 3. 08:11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 안도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 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어와서
나를 뜨겁게 껴안을 때가 있네

- 시집, <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 1999)

* 감상 : 안도현 시인.

1961년 12월 15일,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고 대구 대건고,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그리고 단국대학교에서 석, 박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중등학교 교사로 교직의 길에 들어섰지만, 당시 전교조 사건에 휘말리면서 6년여 해직 교사가 되었습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과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각각 '낙동강',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당선,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100여 권이 넘는 시(선)집과 책을 낸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1996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2002년 노작문학상, 2005년 이수문학상, 2007년 윤동주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의 전북지역위원회 상임공동대표, 한국작가회의 소통위원회 위워장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비롯해 <모닥불>(창비, 1990),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1999), <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2002), <그리운 여우>(창비, 2000), <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 1990),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2001),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2008), <북항>(문학동네, 2012),<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 2020) 등 지금까지 11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를 읽으면서 폭풍 공감이 가는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웬만한 큰일은 그런대로 이력이 생겨 견딜만한데, 오히려 별것 아닌 것, 괜한 말 한마디, 상대의 대수롭지 않은 눈빛이나 태도, 작은 행동 하나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인이 말하는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도 다른 사람은 곁에 있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당사자 개인만이 느끼거나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들입니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오는 치통’,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등은 극히 개인적인 일상에서 건져 올려진 경험이나 느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이, ‘내 몸에 들어와서 /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온통 삶을 뒤집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뒤집힌 서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고 변명을 하면서 소주 한잔 마시러 간다고 익살스럽게 고백하는 시인의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는 한잔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 내 몸에 들어와서 / 나를 뜨겁게 껴안을 때가 있네’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서러워하거나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아닌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와 나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대는 서글픈 ‘현실’을 한잔 술로 해결하는 시인의 모습이 어쩌면 다정다감하게 다가옵니다. 소주 한잔이 내 몸에 들어와 ‘나를 뜨겁게 껴안는다’고 표현한 마지막 연이 있어 시가 비로소 완성되는 듯합니다.

실, 안도현 시인이 이 시를 쓸 무렵에 발표한 또 다른 글 중에는 ‘작고 하찮은 것들’을 노래한 이런 산문 글도 있습니다. 시인답게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들에 세심한 눈길을 주는 표현들이 참으로 재미있고, 빙그레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 글에서 시인은 작고 하찮은 것들에 귀 기울이고 눈길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가슴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작고 하찮은 것들

- 안도현

버스를 기다려 본 사람은주변의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기억한다
그런 사람들은 시골 차부의유리창에 붙어 있는 세월의 빗물에 젖어누렇게 빛이 바랜 버스 운행 시간표를 안다
때가 꼬질꼬질한 버스 좌석 덮개에다자기의 호출번호를 적어놓고애인을 구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의 풋내나는 마음도 안다
그런 사람은 저물 무렵 주변의 나무들이 밤을 맞기 위해어떤 빛깔의 옷으로 갈아 입는지도낮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저녁 연기가 어떻게 마을을 감싸는지도 안다
그리고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버스는천천히 오거나 늦는다는 것도 안다
작고 하찮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분명 가슴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 수필집,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샘터사, 1998)

'작고 하찮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일갈한 안도현 시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것이지만 허투루 듣지 않고, 또 관심없이 지나치는 게 아니라 눈과 귀뿐 아니라 마음을 열고 보고 들어야겠다고 이 시간 스스로 다짐해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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