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민지의 꽃 - 정희성

석전碩田,제임스 2022. 8. 17. 06:05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꽃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시집 <시(詩)를 찾아서>(창비, 2001)

* 감상 : 정희성 시인.

1945년 2월 21일,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용산고등학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부터 숭문고등학교 교사로 35년 교단을 지키다가 지난 2007년 2월 정년퇴직했습니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변신'이라는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집으로 <답청>(창비, 19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비, 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비, 1991), <답청>(재간행, 문학동네, 1996), <시를 찾아서>(창비, 2001),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고마워요 미안해요>(화남출판사, 2009), <고래>(책만드는집, 2012), <그리운 나무>(창비, 2013), <고래 2018>(문학나무, 2018), <흰 밤에 꿈꾸다>(창비, 2019) 등이 있습니다. 1981년 김수영문학상, 1997년 시와시학상, 2001년 만해문학상, 2003년 현대불교문학상, 2014년 구상문학상 본상, 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0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71년 4월 2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기공식에서 학생 대표로 축시(‘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이’)를 낭독할 정도로 정희성 시인은 이미 ‘시인’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64년, 서울대 대학문학상에 당선되었을 뿐 아니라 대학원 재학 중 휴학하고 군복무(ROTC 장교) 중에, 일간신문의 신춘문예에도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50년을 시인으로 살았지만 시집은 열 권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과작(寡作)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세간에 알려지는 유명 시인이 되었습니다.

1970년과 80년대, 시인이 살아왔던 시대는 암울했고 또 억압적인 군부 독재 시절이었습니다. 천상 '고등학교 국어선생'이었던 시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절제된 감정과 차분한 어조’로 민중의 일상적인 삶을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폭압적인 권력에 맞서 시인의 위치에서 최소한의 시대적 사명감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칫 나태해지려고 하는 순간 자신 속의 ‘시인 정신’을 늘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늘 죄스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생명과 직업을 송두리째 포기하면서까지 대열의 맨 앞에 섰던 동지들의 그것에 비하면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감상하는 시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 할 시입니다. 그저 아름다운 강원도 산골에서 어린아이가 자연에서 자라는 잡초꽃에 물 주는 걸 서정적으로 묘사한 시이기보다는, 편견과 속물근성에 자꾸만 세상의 때가 묻어가는, 그래서 ‘내 말은 때가 묻어 있어 /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시인 스스로를 불현듯 흔들어 깨우는, '자성(自省)의 시'라는 말입니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시인의 제자는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으로 귀촌을 하였나 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섯 해를 지내면서 낳은 딸 민지를 키우고 있었는데, 바로 그 구체적인 곳에 시인이 방문한 사실을 밝히며 시는 시작이 됩니다. 마치 소설의 도입부를 읽는 듯합니다.

음 장면은 산기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다섯 해를 보낸 민지, 그리고 도회지에서 온 낯선 방문자 시인의 만남이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것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바로 이 장면에서 마치 크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습니다. 당장이라도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는 시인의 표현, 그리고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라는 표현은 이 시에서 ‘시적 은유’ 역할을 하는 중요한 문장일 것입니다. 이미 잡초라고 규정해 버린 시인의 편견, 그리고 나는 이미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오만과 교만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너는 그것도 모르고 거기다 물을 주니’라는 업신여기는 마음까지도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의 이런 자기 기준에 가득찬 ‘때가 묻은’ 질문에, 서슴없이 민지는 한마디를 합니다. ‘꽃이야’. 그리고 그 말 한마디에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는 시의 마지막 문장은 풀잎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인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촌철살인과도 같은 비수가 되었습니다. 진실과 순수, 그리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인식, 바로 ’민지의 꽃‘이었고, 그 꽃으로 인해 시인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 이 세상에 ‘잡초’라는 이름의 식물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풀이나 식물의 이름을 모를 뿐이지 저마다의 고유한 이름이 다 있습니다. 이름이 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잡초’라고 규정지어 버리고, 또 그렇게 규정된 그 잡초는 우리에게 그저 ’별로 중요하지 않은 풀‘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민지’처럼 ‘잡초’를 ‘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언어와 태도가 달라지고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었던 무명의 풀이 ‘꽃’으로 풋풋하게 깨어나게도 할 것입니다.

늘 하루, 내가 평소 그저 잡초처럼 바라본 ‘꽃’은 없었는지 깨어 있는 눈으로 둘러볼 일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