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나는 오늘도
- 김동리
오늘 아침엔 월급 봉투로 연탄을 들이고
어저께는 문인협회의 위원에 뽑혔습니다
내일엔 다방에 나가 악수를 널어 놓고
저녁때엔 어느 편집장과 술을 마실 예정입니다
지난해엔 둘째 아이의 임파선 수술을 보았고
이달엔 ‘섰다’에 미쳐 밤을 새고 다닙니다
시는 어려서부터 일찍이 손을 대인 것
소설은 약관에 이미 당선이 되었지만
아직 어느 나무 그늘 아래도 내 마음 쉴
의자 하나 놓여 있지 않습니다
봅소서, 나를 지키는 그대의 맑은 눈동자
앉으나 서나 가나 머무나 언제 어디서고
나에게서 떠남 없는 그대의 영원한 눈길이여
이제 나는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굽은 채
서울역이나 서대문 가는 전차를 잡으려고
동대문 모퉁이를 헐떡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봅소서, 이렇게 나는 오늘도 찬 바람
흐린 햇빛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 <김동리가 남긴 詩> (유고시와 대표시, 그리고 해설과 평론 모음)(권영민, 문학사상사, 1998)
* 감상 : 김동리 소설가, 시인.
1913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에 향년 81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본관은 선산(善山). 호적 명이 김창귀(金昌貴), 족보 명은 김태창(金太昌), 아명(兒名)은 창봉(昌鳳), 자는 시종(始鍾), 호가 동리(東里)입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의 17대 손으로 아버지는 김임수(金壬守)입니다. 동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큰형은 동양철학자 범부(凡父) 김기봉(金基鳳)이며, ‘동리’라는 호는 그가 지어준 것입니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기독교인이었던 이유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경주제일교회 부설학교였던 계남소학교와 대구의 계성중학교, 그리고 서울로 편입한 경신중학교 등 모두 미션 스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식적인 학교 이력은 1929년 경신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하면서 종료되고 맙니다. 낙향하여 박목월 등과 사귀며 동서양의 고전에 심취, 인간과 자연과 신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김달진·서정주 등의 <시인부락>동인들과 사귀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서정주는 큰형의 제자였습니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되면서 등단하여 ‘망월’, ‘고목’ 등을 발표하였으나 곧 시 쓰기는 중단하고 소설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듬해인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는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 창작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받은 상금으로 다솔사, 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쓴 소설 ‘산화(山火)’가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다시 당선되어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습니다. 그 후 본격적인 소설가로서 창작을 하면서 단편소설 ‘바위’(신동아, 1936. 5), ‘무녀도’(중앙, 1936. 5) 등의 문제작들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1930년대 후반 가장 주목 받는 신세대 작가로 부각되었습니다. 서정주와 함께 결성한 <시인부락>(1937년)은 당시 신세대 문학의 기수 역할을 하였으며 자신만의 탄탄한 문학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1940년까지 ‘황토기’(문장, 1939. 5), ‘찔레꽃’(문장, 1939. 7), ‘동구 앞길’(문장, 1940. 2), ‘다음 항구’(문장, 1940. 9) 등을 계속 발표했으나, 일제의 어용 문학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는 것을 거절, 자신이 운영했던 계몽학교인 <광명학원>이 강제 폐쇄되어 만주 지방을 방랑하기도 했습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그는,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 1948년 <민국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고, 오랫동안 한국 문학가협회 소설분과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문예지의 발행에도 힘써 1949년에 창간한 <문예>와 1968년에 창간한 <월간문학>의 주간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1972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장을 역임하였고, 1973년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69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그 후 1983년에 두 번째 이사장 역임), 1981년 예술원 회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한일문화교류협회장 등 주요 문예 단체의 대표를 맡아 활발한 문단 활동을 펼쳤습니다.
1990년 7월 30일,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5년 6월 자택에서 별세했습니다. 그가 쓰러진 후, 1987년에 재혼한 30년 연하의 소설가 서영은 셋째 부인과의 재산 분쟁 소식이 여러 여성 잡지에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음유 시인’이라는 별칭을 가진 가수 이동원이 노래로 부르면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지게 된 김동리의 유고 시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엄밀히 따져 보면 ‘오늘’이라는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져 가는 ‘동대문 모퉁이를 헐떡이며 돌아가고 있’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시의 첫 연에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어제 – 오늘 – 내일’로 가지런히 이어지며 흐르기도 하지만, ‘저녁때 – 지난해 – 이달’ 등 삶 속에서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여러 상황에 대처하느라 무작위로 쌓여져 가는 ‘오늘’들의 집합일 뿐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설로 치면 마치 도입부에 해당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2 연에서는 그런 오늘의 흐름 속에서 개인적으로 큰 성공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을 달성하기도 했지만, ‘아직 어느 나무 그늘 아래도 내 마음 쉴 / 의자 하나 놓여 있지 않’다고 시인은 슬프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감상할 때 그저 추임새 정도로 쓰인 것 같은 ‘봅소서’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연은 ‘봅소서’로 시작하면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노래의 악보로 치면 단조음이 계속되다가, ‘봅소서’라는 여흥구와 함께 갑자기 ‘장조음’으로 바뀐 것이라고 표현하면 적합할까요. 시인은 마치 신앙 고백을 하듯이 이렇게 외칩니다. ‘나를 지키는 그대의 맑은 눈동자 / 앉으나 서나 가나 머무나 언제 어디서고 / 나에게서 떠남 없는 그대의 영원한 눈길이여’. 그리고는 나를 지키는 그 대상으로 인해 ‘서울역이나 서대문 가는 전차를 잡으려고’ 오늘 하루를 숨을 헐떡이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한 사람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1, 2 연에서 ‘그저 그런 하루하루’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달라진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비록 이제는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굽은’ 보잘것없는 모습이지만 그것이 바로 달라진 ‘나’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는 마지막 연에서도 또 ‘봅소서’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비록 ‘찬 바람 흐린 햇빛 속에’ 살아가는 ‘오늘’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앉으나 서나 나를 지켜주는 그 맑은 눈동자의 ‘그대’로 인해 완전히 다른 ‘오늘’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봅소서’입니다. 구약 시편의 시들을 읽을 때 가끔 시인이 스스로 감격하여, ‘할렐루야’ ‘셀라’ ‘내 영혼아’ 등 리듬을 맞추는 추임새를 사용하고 있는 방식과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동원이 부른 노래도 ‘봅소서’가 있는 부분만 곡조를 붙여, 차분한 나레이션으로 풀이 죽어 있는 듯하다가, ‘봅소서’라는 감탄사와 함께 다시 살아난 느낌을 극적으로 표현한 걸 보면, 곡을 붙인 작곡가도 제대로 시를 해석한 듯합니다.
‘봅소서, 이렇게 나는 오늘도 찬 바람 / 흐린 햇빛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 석전(碩田)
https://youtu.be/D_63_auoo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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