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가을날 - 릴케 / 가을의 기도 - 김현승

석전碩田,제임스 2022. 9. 21. 07:04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주소서.

막바지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하루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푸시어,
영근 포도송이가 더 온전하게 무르익게 하시고,
짙은 포도주 속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남아,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1902년 파리에서

Herbsttag

- Rainer Maria Rilke

Herr; 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ß.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
 Befiehl den letzten Fruechten voll zu sein;
gieb ihnen noch zwei suedlichere Tage,
drae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uess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aetter treiben.

- Aus: Das Buch der Bilder(1902)

* 감상 :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시인, 소설가. 1875년 12월 4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886년부터 1891년까지 육군 학교에서 군인 교육을 받았으나 중퇴하였습니다. 프라하, 뭔헨, 베를린 등에서 대학 공부를 하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꿈과 동경이 넘치는 섬세한 서정시를 썼습니다. 1926년 12월 29일, 장미 가시에 찔려 평소 앓고 있던 백혈병이 악화되면서 51세의 나이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패혈증이었습니다.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릴케는 연인 루 살로메를 만나 러시아 여행을 떠난 후 사랑을 나누면서 그 녀을 위해서 쓴 시들이 <그대의 축제를 위하여>라는 시집에 실려있습니다. 1902년 이후에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조각가 로댕을 만났으며 그의 비서가 되었는데, 그는 로댕의 작가로서의 삶의 철학인 ‘사물을 깊이 관찰하고 성찰하는 능력’을 이 때 길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가 완벽한 조각 작품처럼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우주가 되는 시를 쓰려고 애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인간의 성장을 아름답게 그려 낸 일기체의 장편 소설 <말테의 수기>를 발표한 시기도 이즈음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을을 노래한 릴케의 시일 것입니다. 인생의 가을에 빗대어 계절의 가을을 노래한 이 시는 ‘모든 것을 온전히 내려놓고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일종의 기도문’과도 같은 시입니다. 마치 하나님께 겸손하게 기도하듯 속삭이는 표현들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겸허하게 내려놓고 함께 기도하게 하는 그런 시입니다. 이 시는 김현승 시인의 시 ‘가을의 기도’에 많은 영향을 준 시로도 유명합니다.

시의 묘미는 지나간 여름을 '과거'로 표현하고 있고, 그 여름이 '참으로 위대했다'고 서술하는 첫째 문장에 있습니다.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비유한다면 여름은 가장 왕성하고 에너지 넘치는 기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그 에너지 넘치는 여름’을 참으로 위대하게 보낸 자에게만 '한정적으로' 해당하는 노래인 것처럼 가장 첫 행에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는 문장을 선언적으로 두었다는 말입니다. 이 첫째 문장을 읽을 때,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단테가 신곡에서 ‘미지근하게 사는 사람은 지옥에도 못간다’는 문장을 새삼 다시 읽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여름을 너무도 뜨겁게 보냈기에 '위대했노라'고 스스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겸허하게 드릴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이 시인 듯 말입니다.

제 인생의 ‘겨울’이 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라고 시인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을날’처럼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은 그의 기도 속에 들어있는 표현들 즉 '마지막',  '하루 이틀만 더'등의 시어들인데, 절박하고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들판에 바람을 풀어 놓아주소서 // 마지막 열매들이 완전히 영글도록 명해 주소서 / 그들에게 하루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푸셔서/ 영근 포도송이가 더 온전하게 무르익게 하시고, / 짙은 포도주 속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주소서’.

러나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지금까지 간절하게 드렸던 기도 마져도 결국은 또 다른 업(業)을 쌓는 부질없는 일일지 몰라, 자신을 ‘집이 없는 사람’으로 빗대어 노래합니다.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남아 / 잠에서 깨어나면,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 나뭇잎들이 뒹굴 때면 가로수 길 사이로 / 이리저리 불안스러이 거닐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최대한 겸손하게 내려놓습니다.

풍 힌남노에 이어 난마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나브로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꺼내든 가을 시집에서 눈에 띈 시가 바로 릴케의 ‘가을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와 함께 한국 사람들에게 가을이 깊어가는 즈음에 가장 애송되는 김현승의 시였습니다. 왜냐하면 저 개인적으로는, 올해 여름이 시작되는 지난 5월부터 나름의 태풍 같은 소용돌이를 참으로 잘 건너온 터라, 더욱더 공감이 가는 시였다고나 할까요. 어느 날 갑자기 살던 집이 팔리고, 또 이사 갈 집을 정해서 계약을 하고, 리모델링 하고 이사하는 복잡한 절차. 거기에다가 34년을 근무했던 직장을 마무리 하고 제2의 삶을 시작하는 일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난마돌’ 같은 대형 태풍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조금씩 안정이 되어가는 때,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나의 소박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그리고 이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석전(碩田)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문학 예술>(1956.11월호), <김현승 시전집>(민음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