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민복

석전碩田,제임스 2022. 9. 28. 06:52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 함민복

1
열차가 도착한 것 같아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스크린도어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민망하여 별로 놀라지 않은 척 주위를 무마했다
스크린도어에, 옛날처럼 시 주련(柱聯)이 있었다
문 맞았다

2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 감상 : 함민복 시인.

1962년 9월,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보증인 두 명을 세워 수업료가 무료이고 또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고등하교를 졸업한 후 경북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입사하여 4년간 근무하다 그만두고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2학년 때인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이라는 시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1989년에는 <아동문학평론>에 동시 ‘강’이 추천을 받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우울氏의 一日>(1990), <자본주의의 약속>(1993),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1996),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 <꽃봇대>(대상, 2011, 카툰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 2013),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2009),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문학동네, 2019),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이레, 2003), <미안한 마음>(풀그림, 2006),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현대문학, 2009), <절하고 싶다>(2011), <섬이 쓰고 바다가 그려주다>(시공사, 2021) 등이 있습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1998), 김수영문학상(2005), 박용래문학상(2005), 애지문학상(2005), 윤동주문학대상(2011), 제비꽃 서민시인상(2011), 권태응 문학상(2020)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년 퇴직을 하고 이곳 구파발로 이사 온 후, 이른 아침 운동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체육관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가급적 지하철을 이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통 체증없이 약속한 장소에 정확하게 도착할 수 있다는 장점 등 여러 가지 잇점이 있지만 몸에 익숙하지 않아 불편한 면이 없진 않습니다. 그러나 차차 나아지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함민복 시인의 서울지하철을 다룬 시 한 편을 꺼내 보았습니다.

“오늘 결혼하는 함민복 시인은 고통, 고생, 가난, 외로움 속에서도 반짝이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시로써 표현해 온 시인입니다. 더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훌륭한 사람인지를 스스로 잘 모른다는 거지요.”

2011년, 그의 나이 쉰 살이 되던 해, 동갑내기 고향 친구가  강의했던 시 창작 교실 수강생으로 배우러 왔을 때 만나서 늦은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주례를 맡았던 소설가 김훈이 했던 주례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론가들은 함민복 시인의 시는 ‘관념의 거품과 지적 허영을 배격하고 삶을 닮은 시, 시를 닮은 삶을 표방하기 때문에 군더더기와 허세가 전혀 없다’고 평합니다. 그래서 함 시인의 시는 평이하고 쉬워 보이지만 더 넓고 깊은 울림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언제나 자신이 살아내는 딱 그만큼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달동네와 친구 방을 전전하며 떠돌다 1996년, 우연히 놀러 갔던 강화도의 마니산이 좋아서 시인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오십이 될 때까지 혼자 ‘청빈의 시인’으로 살다가 늦은 장가를 들었습니다. 동막해변, 보증금 없는 월세 10만원 짜리 양철지붕 폐가를 세내어 살면서 강화 시골의 이웃과 뻘과 섬, 달과 하늘을 노래했던 그는, 어느 매체와 했던 인터뷰에서 ‘방 두 개에 거실도 있고 텃밭도 있으니 나는 중산층’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가난한 시인’ ‘자본에 저항하는 빈자의 표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강화 촌구석에 살고 있던 시인이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왔다가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는, 완전히 변한 최근의 지하철 광경과 그 스크린도어 위에 씌여 있는 소위 ‘지하철 詩’에 놀라 조금은 민망했던 느낌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민망했던 이유는 ‘옛날처럼, 시 주련(柱聯)이 있었다 / 문 맞았다’는 1연의 마지막 짧은 시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촌사람, 그리고 옛날 사람인 시인이 주렁 주렁 시로 무장을 하고 있는 ‘문’한테 놀랄 정도로 한 대 엊어 ‘맞았다’고 표현을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놀라긴 놀랐나 봅니다.

런데 이런 놀람은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지하철 문이 열리고 열차 안에 입장하면서 펼쳐진 2연의 장면에서 더 가관(可觀)입니다. 옆 사람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고 귀에는 이어폰을 낀채 들고 있는 핸드폰에만 온통 집중하는 사람들이 마치 시인의 눈에는 ‘청진기를 귀에 꽂은 젊은 의사들’로 보인 것 같습니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의사들은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 전파 그물을 기우며 /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고 시인은 그 풍경을 한눈에 스케치합니다.

놀라운 광경을 시의 마지막 한 문장으로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이 이 시의 백미입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표현은 가히 함민복 시인답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핸드폰이 손에서 떨어지면 불안 초조해하는 전철 안의 사람들은 ‘의사’가 아니라 어쩌면 ‘환자’일지도 모릅니다. 뭔가에 집중하는 그들이 도대체 뭘 보는지 슬쩍 곁눈질 해 보면 그들이 보는 화면은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동영상 등 그저 고만고만한 수평적 사고의 평준화로 그 깊이를 더해가는 콘텐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온통 집중하여 ‘의사’처럼 진찰 진단하고 연구하는 것 같지만, 또 거창하게 주렁 주렁 달려있는 주련들이지만, 실상은 그 앎의 깊이는 일천(日淺)하여 그저 찰나적인 즐거움을 주는 정보들만 두 손가락으로 클릭하고 있는, ‘수평의 평준화’만 있을 뿐이라고 강화 촌사람은 ‘서울 사람’들을 시원하게 한 방 먹이는 시어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시 한 편으로도 시인이 도시 사회와 물질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한지 알아 차리 수 있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그의 시 하나를 더 읽어보면 ‘시를 닮은 삶, 삶을 닮은 시’로 이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려고 하는 ‘시인이 제안하는 대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 스스로 날카롭고 뾰족하게 수직의 힘으로 대항하려고 애썼다면, 이제는 말랑말랑한 힘, 즉 ‘인간의 본성’ ‘원초적인 것’에 그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겠다는 시인의 삶의 자세가 엿보인다고나 할까요.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민복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 줄 호롱 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흔들어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

그물 넝쿨을 걸고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

‘힘으로 내리박는 것이 아니라’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고 어쩌면 외설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너스레를 떠는 시인의 깨달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완력이나 힘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힘’들이 연대(連帶)하면 뻘 같은 이 세상에 새로운 말뚝을 박듯 이 세상의 질서도 새로 짤 수 있다고 노래하는 그의 '희망 노래'에 연대의 응원 박수를 보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