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망각을 위하여 / 눈송이 당신 - 문정희

석전碩田,제임스 2022. 10. 5. 06:45

망각을 위하여

- 문정희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한 일은
그동안 쓴 시를 고치고 주무르다가
망가뜨린 일이다
시는 고칠수록 시로부터 도망쳤다
등 푸른 물고기떼 배 뒤집고 죽어 가듯이
생명이 빠져나갔다

꽁지 빠진 새처럼 앙상한 가지에 앉아
허공을 보고 나는 조금 울었다
벌목꾼처럼 제법 나이테 굵은 침엽수 활엽수
다듬고 쪼개다가 볼쏘시개를 만들고 만 것이다
지난봄부터 가을까지
헛것과 헛짓에 목매단 것이다

나는 울다가 눈을 떴다
그래 이대로 절뚝이며 살아라
나 또한 헛짓하며 즐거웠다
나는 시들을 자유로이 놓아주었다
부서진 욕망, 미완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
불온한 생명이여
어쩌다 내가 기념비적인 기둥 하나를 세웠다 해도
얼마 후면 그 기둥 아래
동네 개가 오줌이나 싸놓고 지나갈 것을*註

* 註 : 헝가리 소설가 산도르 마라이

-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민음사, 2022. 8)

* 감상 : 문정희 시인.

1947년 5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습니다.진명여고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부, 석사과정을 마친 후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동국대 석좌교수 등을 거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한국 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북인, 2008), <아우내의 새>(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남자를 위하여>(민음사, 1996),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나남, 1989),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미학사, 1992), <오라, 거짓 사랑아>(민음사, 2001),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2004), <다산의 처녀>(민음사, 2014), <응>(민음사, 2014), <나는 문이다>(민음사, 2016), <작가의 사랑>(민음사, 2018),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미음사, 2022) 등이 있습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목월문학상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스웨덴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난 주 수요일, 이사한 집으로 우편물로는 처음 등기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뜯어보았더니 문정희 시인의 최근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가 들어 있었습니다. 제주도 <시인의 집> 손세실리아 시인이 보내 준 것인데, 표지를 넘기니 그다음 장에는 작가가 직접 서명하고 도장까지 찍혀있었습니다.

단 후 50년의 시력을 가진 베테랑 시인이 지금까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자신의 시들을 그저 ‘절뚝 거리는 미완’이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서 그만 숨이 턱 막히고 말았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또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허겁지겁 단숨에 다 읽은 후, 침대 머리맡에 두고 며칠 동안을 읽고 또 읽으면서 마치 한 사람 시인을 생생하게 만나듯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인은 지난봄부터 지금의 나이인 ‘가을까지’ 수많은 시집을 냈지만 그것을 ‘그동안 쓴 시를 고치고 주무르다가 / 망가뜨린 일’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시의 초입부터, 그동안 자신이 시를 쓴 게 아니라 좀 더 멋진 시를 쓰려고 ‘고치는 일’을 했다니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리고 시를 쓰면 쓸수록 정작 시인 자신은 시로부터 멀리 도망쳤을 뿐이라고 슬프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2연에서 시인은 ‘꽁지 빠진 새처럼 앙상한 가지에 앉아 / 허공을 보고 조금 울었던’, 말하자면 자신이 시를 망가뜨린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나무를 다루는 벌목꾼도 아니면서, 가당치도 않게 나이테가 굵은 침엽수, 활엽수 닥치는 대로 쪼개고 다듬다가 결국 ‘불쏘시개’를 만들었다고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시인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는 듯합니다. 자신이 이룬 것을 한마디로 ‘불쏘시개’ ‘헛짓과 헛것에 목매단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누구라도 센티멘탈해지는 ‘가을’이어서 더욱 그렇게 느낀 것일까요.

러나 시인은 여기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다음 3연에서, 이런 자신을 돌아보면서 결국 시를 쓰다가(울다가) ‘눈을 떴다’고 선언하면서 대반전(大反轉)을 선언합니다. ‘그래 이대로 절뚝이며 살아라’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구절을 읽으면서, 마치 시인이 내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같이 들리는 건 왜일까요. ‘그래,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마. 지금까지 너는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어. 이제부턴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으로 가던 방향으로 그대로 계속 걸어가기만 하면 돼’라는 격려와 응원의 말같이 들립니다. '그래 이대로 절뚝이며 살아라'는 말은 시인 자신이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이 한국의 시단에 이뤄 놓은 것으로 치면 큰 이정표가 될만한 ‘기념비적인 기둥’을 세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모든 것들이 한낱 욕망과 욕심, 또 미완의 상처에서 흐르는 ‘불온한 생명’이었을 뿐임을 고백하면서, 그래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분신인 시를 이제는 ‘있는 그대로’ 놓아주기로 결단합니다. 더 나아가 ‘어쩌다 내가 기념비적인 기둥 하나를 세웠다 해도 / 얼마 후면 그 기둥 아래 / 동네 개가 오줌이나 싸놓고 지나갈 것’이라고 노래하면서 통쾌한 반전의 어퍼컷으로 시를 마무리하는 여유도 부리고 있습니다.

은 시집 속에 있는 한 편의 시를 더 읽고 싶습니다. 이제 시인의 나이 일흔다섯, 많다면 많은 나이이고, 100세 시대를 실천하고 있는 김형석 교수가 '70대가 가장 재미있고 좋았다'고 고백한 걸 보면 아직도 젊은 나이입니다. ‘눈송이 당신’이라는 시 속에 시집의 표지 제목으로 사용된 구절이 나옵니다. 여느 시집들처럼 실린 시 제목 중에서 하나를 고르지 않고 시 속에 있는 문장으로 시집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제 곧 닥칠 인생의 겨울, 눈송이가 내리는 겨울이 곧 다가오겠지만 시인이 처음 시를 만났을 때의 그 열정과 흥분, 호기심이 가득찬 사랑의 마음으로 ‘눈송이 당신’을 먹어버릴 정도로 함께 하고 싶다고 노래한 시입니다. ‘눈송이 당신’은 당연히 시인이 ‘즐겁게 했던 헛짓’을 표현하기 위한 시적 은유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왕성하게 시 고치는 일'을 여전히 계속해 나가겠다는 다짐입니다. 비록 그것이 그녀의 표현대로 ‘미완성으로 완성’일지라도 참 황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송이 당신

- 문정희

처음 만났는데
왜 이리 반갑지요
눈송이 당신
처음 만져보는데
무슨 사랑이 이리 추운가요
하지만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요
하늘이 쓴 위함한 경고문 같아요.
발자국도 없이 내 곁에 온
하늘의 숨결
눈송이 당신
슬며시 당신을 좀 먹고 싶어요
당신의 눈부심을
당신의 차가움을 혀로 홡고 싶어요.
이윽고 당신의 눈물과 함께
깊은 땅속으로 녹아들고 싶어요

-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민음사, 2022. 8)

인은 자신에게 찾아 온 시를 ‘발자국도 없이 내 곁에 온 / 하늘의 숨결’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리고 그 ‘눈송이 당신’을 먹고 혀로 홡고, ‘이윽고 당신의 눈물과 함께 / 깊은 땅속으로 녹아들고 싶’다고 희망의 찬가를 높이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치오 디비나(Lectio Divina, 라틴어, 거룩한 독서), 이 가을에 '독서의 즐거움'을 선물해 준 문정희 시인과 또 저자의 친필을 받아 시를 사랑하는 전국의 애독자들에게 일일이 배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제주 조천 <시인의 집> 손세실리아 시인께 고마움의 마음을 표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