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 일기
- 이해인
아플 땐 누구라도 외로운 섬이 되지
하루 종일 누워 지내면
문득 그리워지는 일상의 바쁜 걸음
무작정 부럽기만 한 이웃의 웃음소리
가벼운 위로의 말은 가벼운 수초처럼 뜰 뿐
마음 깊이 뿌리내리진 못해도
그래도 듣고 싶어지네.
남들 보기엔 별것 아닌 아픔이어도
삶보다는 죽음을 더 가까이 느껴보며
혼자 누워 있는 외딴 섬
무너지진 말아야지
아픔이 주는 쓸쓸함을
홀로 견디며 노래할 수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삶을 껴안는 너그러움과
겸허한 사랑을 배우리.
-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 (마음산책, 2010년)
* 감상 : 이해인 시인, 수녀.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습니다. 깊은 신앙으로 사람들이 겪는 고독과 슬픔, 고뇌와 갈등을 진솔하게 나누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누리는 수녀 시인입니다. 그녀를 이곳에 소개하는 것은 외람된 일이라 생략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그녀의 시는, 2008년 대장암 3기 판정을 받고 암 투병을 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기 형식으로 쓴 시입니다. 그리고 같은 시집에 실린 같은 시기에 쓴 시 ‘슬픈 날의 일기’도 함께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해인 수녀는 현재 방사선 치료도 다 끝나고 1년에 한 번씩 검진만 받는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완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악화되지 않고 일상을 영위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는 상태이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리고 부산 성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일과표대로 지내면서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찾아오는 독자들을 매일 맞는다고 합니다.
이해인 시인의 시는 시를 시답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시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정식 문단에서는 문학적으로는 그다지 높게 평가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니 ‘높게 평가 받지 못한다’는 표현은 점잖은 표현이고 그동안 ‘배척당해 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산문인지 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고 전혀 시답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시를 처음 배우는 이들에게는 ‘위험천만한 접근 금지’ 팻말이 붙어 있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문학적인 평가에서 소외되었다고 해서 이해인 수녀의 시와 글들을 깎아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태도일 것입니다. 그동안 그녀의 시를 통해서 삶의 위안과 격려, 감동을 얻어 치유를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든든한 응원자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을 통한 시, 산문, 그리고 묵상 글들을 진솔하게 나누면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던 이해인 시인도 2008년 암 판정을 받으면서 도리 없이 ‘외로운 섬’이 되었습니다. ‘가벼운 위로의 말은 가벼운 수초처럼 뜰 뿐’이어도 ‘그래도 듣고 싶어’진다고 하는 시인의 솔직한 마음이 오히려 더 진한 사람의 체취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너지진 말아야지 다짐하는 그 마음이 찡하게 전달되어 옵니다.
지난 주, 친구가 높은 뜻 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님께서 첫 항암 치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했던 설교 동영상을 보내주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 그는 자신이 암에 걸려 보니까, 그제야 암 환우들의 아픔과 마음을 공감하게 되었다고, ‘진짜 참 아프더군요’라면서 울먹이는 대목에서는 울컥 설움이 북받치는 공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접 아파 본 사람만이 아는 동병상련의 공감과 위로라고나 할까요. ‘아픔이 주는 쓸쓸함을 홀로 견디며 노래할 수 있을 때’ ‘겸허한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이해인 시인의 표현이 그래서 교조적인 충고나 가르침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다음에 또 소개해드리는 이해인 시인의 ‘슬픈 날의 일기’와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이라는 두 편의 시도 아마 아파 보기 전에는 우리가 평소에 하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정작 아파보니까 ‘한마디 말’이 얼마나 소중하고 조심해야 하는 지를 느낀 것을 노래하는 시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 먹고 시작한 내 이야기를 상대가 듣는 둥 마는 둥 귀담아 듣지 않는 건 물론, 또 들었다고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전달하면서 별 것 아닌 것처럼 ‘허공에 허무하게 날려 버릴 때’의 그 섭섭함과 외로움은 겪어 본 사람이라야 아는 마음입니다.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그 녀의 강연집에는 말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가 고등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서 1등을 했는데 친구가 “글 잘 쓰는 애가 오죽 없으면 네가 1등을 했느냐?”고 한 말이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말끔히 가시지 않을 정도로 말에 의한 상처는 오래간다는 내용이 눈에 띕니다. 또 시인은 “악의 없이 좋은 뜻으로 한 말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교만하고 미워서 하는 말의 병폐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파괴력이 있는 만큼 고운 말을 골라 써야 한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하다고 해서 가시가 있는 말을 자꾸 하다보면 관계가 매우 서먹해지면서 결국은 갈라지는 경우도 있다”면서 이제 거의 완치 판정을 받고, 새롭게 주어진 지금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생명을 걸고, ‘아름다운 말을 전하는 전도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 아침, 시인의 시편 기도가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말들이 이웃의 가슴에 꽂히는 기쁨의 꽃이 되고 평화의 노래가 되어 세상이 조금씩 더 밝아지게 하소서.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를 가다듬게 하소서.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 석전(碩田)
슬픈 날의 일기
- 이해인
마음먹고 시작한 나의 이야기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고
바람 속에 흩어버릴 때
말로는 표현 못할
내 맘속의 슬픔과
자신에겐 길었던
고통의 순간들을
내 가까운 사람이
다른 이에게
너무 짧고 가볍게 말해버릴 때
새롭게 피어나는 나의 귀한 꿈을
어떤 사람은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며
허무한 웃음으로 날릴 때
나는 조금 운답니다
성자들은 자신의 죄만 크게 여기고
남들은 무조건 용서한다는데
남의 죄를 무겁게 여기고
자신의 죄는 가볍게 여기는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볼 때도
나는 조금 운답니다
슬픔은 이리도
내게 가까이 있는데
어떻게 순하게 키워서
멀리 보내야 할지
이것이 나에겐
어려운 숙제입니다
-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 (마음산책, 2010년)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 이해인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역겨운 냄새가 아닌
향기로운 말로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말들이 이웃의 가슴에 꽂히는
기쁨의 꽃이 되고 평화의 노래가 되어
세상이 조금씩 더 밝아지게 하소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리 없는 험담과 헛된 소문을
실어 나르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말을 하게 하소서
늘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말을 하게 하시고
남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한 포기의 난을 가꾸듯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를 가다듬게 하소서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 이해인 수녀 강연 자료집 <고운말 차림표>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서 오줌 누고 싶다 - 이규리 (0) | 2019.07.30 |
---|---|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 박지웅 (0) | 2019.07.24 |
삼류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 김인자 (0) | 2019.07.10 |
막노동을 하고 싶다는 후배에게 - 유용주 (0) | 2019.07.03 |
환하다는 것 - 문 숙 (0) | 2019.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