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군 작가의 유화를 보는 순간, 40년 전 대학신문사 편집부장을 그만두면서 '퇴임의 변'으로 내게 주어진 10매 정도의 원고지에 쓴 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이 글의 끝에 다시 올려 놓았습니다.)
모든 작품에 '그리움'이 묻어나는, 시골 신작로 길 위를 달리는 버스 한대가 스토리 텔러가 되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인 고재군 작가의 작품은, 가난한 작가를 위해 영미 선배가 운영하는 삼청동의 작은 카페 <WOOPY>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카페를 상설 전시관으로 제공하는 셈이지요.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아내와 함께 '북촌'으로 유명한 삼청동을 찾았습니다. 큰 아들 홍민이를 작은 결혼식으로 얼렁뚱땅 소리 소문없이 장가 보냈다고, 부부가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갖자고 제안한 선배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사된 자리였지요.
40년을 한결 같이 같은 직장인 KBS에서 전문직 방송 디자이너로 근무하다 이번달부터 은퇴하는 선배는, 퇴직 준비로 삼청동에 이야기가 있는 작은 카페 하나를 열었습니다. 카페 <WOOPY>. 온 가족이 강아지를 좋아해서, 오갈데 없는 유기견 등을 분양 받아 현재 네 마리나 돌보고 있을 정도로 반려견 애호가답게 카페 이름도, 늑대와 개의 합성어인 '우피'로 정했답니다.
한정식 전문점 '소선재(素饍齋)'와 맞닿아 있는 한옥 건물이어서 카페의 내부에 들어서면, 아늑한 옛 추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고풍스런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앞서도 얘기했듯이 발군의 작가들의 작품이 근사하게 벽면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이 공간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귀한 대우를 받는 듯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소선재와 우피 카페가 있는 곳까지 걸으며 데이트를 했습니다. 아기자기한 북촌 골목의 정취들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니까요.
소선재에서의 정갈한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고, 바로 옆 우피 카페에서 선배가 직접 만들어 준 맛깔스런 빙수와 커피, 그리고 그리움과 스토리 텔링이 가득한 공간에서의 수다...한 여름 밤은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흘렀지요.
늦은 밤, 선배 부부의 분에 겨운 따뜻한 내리 사랑을 받고 카페 문을 나서니 밤 하늘에 그믐달이 쪽배처럼 우리를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퇴임의 변]
짜증스런 길이지만 즐기며 갈 수 있길....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는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주옵소서....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날을 잊지 않는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생을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자신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아들을 위한 어느 아버지의 기도 내용이다. 나에게 허락된 몇 장의 원고지를 앞에 놓고 지나간 몇 년간의 학보사 생활을 정리하는 가운데 자꾸 되뇌어지는 기도문이다. 계속해서 학보사 생활을 해 나갈 기자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까지 그렇게 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위한 기도제목이다.
* *
그 길은 석양이 쏟아지는 푸른 포플라가 우거진 길이었다. 주위에는 영글은 호박과 강냉이들이 익어 가는 풍성한 신작로 길이었다. 쏟아지는 햇살과 푸른 색깔이 혼합되어 눈부시도록 찬란했지만 이 길은 차가 지나고 나면 뽀얀 먼지가 피어오르는 그런 길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하루에 한 대 다니는 차가 지나고 난 다음의 짜증나리 만큼 짙은 먼지 속을 달리기 좋아했다. 멀리 옥수숫대 사이로 난 하얗고 좁다란 길을 뽀얀 먼지 일으키면서 멀어져 가는 버스에 나의 작은 소망을 실어 보내면서 생각에 잠기는 것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냥 막연히 차가 닿을 곳을 동경하면서 상상해 보는 보잘 것 없는 어린 소망이었다.
그러다가 방학을 맞아 처음으로 도회지를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게 되었을 때, 마음은 풍선이 되고 어찌 그리 즐거웠는지. 그 버스 안에는 즐거워 어쩔 줄을 모르는 나 같은 아이도 있었고 점잖게 중절모를 쓰고 바깥을 내다보며 가뭄으로 인해 농사걱정을 하는 아저씨도 있었다. 다 헤진 의자에 그런 대로 격식을 갖추고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버스 속에서 오랜만에 만난 수다스런 아낙네들의 수다스러움도 있었지만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나의 순진스런 분방함에는 비길 바 없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손을 흔들어 대는 아이들을 볼 때는 어린 마음에 내가 차를 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어릴 적의 티없는 추억들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오늘은 막 떠난 한 대의 버스를 향해 두 손을 흔들고 있다. 비록 그 길이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짜증스런 길이지만 천진스럽게 그 여행을 즐길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버스도 도회지에 도착할 것이고.
<배동석. 영어교육.4>♥(198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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