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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석전碩田,제임스 2015. 2. 13. 18:17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1.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사반세기 전인 1932년에 출간되었다.” 이것이 이 책의 첫 문장이다. 1960년판을 새로 내면서 저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행여 시대에 뒤떨어진 책이 되지나 않을까 조심스러워 하면서 서문에 적은 글이다. 많은 자료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말았다는 고백이 뒤를 잇는다.

  그럼에도 재판의 발간에 동의한 이유에 대해 그는 ‘아직도 이 책의 중심 주제가 여전히 중요하며, 나는 지금도 그 주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가 말한 중심 주제란 종교적 자유주의 운동과 세속적 자유주의 운동 둘 다 개인의 도덕성과 집단(인종이나 계급, 혹은 민족)의 도덕성 간의 기본적인 차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무지 때문에 ‘오늘날 횡행하고 있는 정치적 질서에 대한 도덕주의적 접근 방법들은 모두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재판이 나온 지도 어언 5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처럼 장구한 세월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 책의 중심 주제가 여전히 중요하며, 이 중심 주제를 바라보는 저자의 통찰력이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경이였고 환희였다.

 

2. 이 책을 번역한 이한우는 책의 말미에서 니버의 약력을 다소 길게 소개하면서 ‘이러한 외적인 지적 경력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니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사실은 ‘중요한’ 그의 약력을 여기에 다시 옮긴다.

  1892년에 태어난 그는 예일신학교에서 1915년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자동차 산업의 중심도시인 디트로이트에서 13년간 목사로 활동했다. 1928년 유니온신학교의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초빙된 그는 1960년(이 책의 재판이 출간된 바로 그 해다)까지 평생 동안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옥스퍼드, 글래스고, 콜럼비아,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 국내외 유수의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으며 기독교 윤리학은 물론 실천신학 강의로 탁월한 명성을 얻었다. 저서로서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외에 『인간의 본성과 운명』등이 있다.

  니버의 저술은 후세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50~60년 이후 미국 정치를 이끌었던 수많은 리더들이 니버를 ‘우리 모두의 아버지’로 불렀으며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도움을 준 5권의 책 중 하나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지목하였다.

 

3. 다시 이한우의 말. “이 책을 처음 대하면 곳곳에 진하게 배어 있는 종교적․윤리적 색채로 인하여 다소 고루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체(style) 상으로만 보면 17세기나 18세기의 대중적인 사상가들의 저서를 읽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는 그만큼 니버의 지적 배경이 탄탄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만큼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한우의 말처럼 처음 니버의 책을 대했을 때, 서론과 첫 장을 읽으며 나는 책이 참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문장은 무척 딱딱했고, 비문(非文)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읽고 이해하고 내 것으로 소화하기에는 뭔가 껄끄러운 페이지들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우리말로 비유하자면 마치 고문(古文)을 읽는 느낌이었다. 이 순간 뇌리를 스쳐간 생각은 번역에 문자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나는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해박한 지식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1930년대에 간행된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토픽(topic)들이 2015년 이 순간까지 여전히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의 혜안에 연방 무릎을 쳐야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나도록 인류가 그의 시대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우린 무엇을 했을까? 무엇을 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리고 말았을까?

 

4.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책에 대해 백과사전(Daum)에서는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개인과 집집단의 행동양태를 분석하고 사회적 정의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 인문서! 이 책의 전편을 통해 일관된 논지는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사회 내의 어느 집단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한다’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타인의 이익을 배려할 수 있지만, 이런 개인이 모인 사회(특히 국가)는 번번이 민족적-인종적 충동이나 집단적 이기심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된 1930년대 초반은 전세계가 대공황으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1차 대전의 참혹한 기억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한편으로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독일의 재무장이 막 시작되려던 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육과 계몽의 의해 인류의 미래가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사회과학자나 종교 지도자에 대해 니버는 ‘사회조직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자선의 문제와 경제적 집단사이의 역학관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렬히 비판한다. ‘집단 간의 관계는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적 관계이며 따라서 사회집단 사이에 작용하는 운동의 강제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도덕과 사회-정치적 정의가 양립하는 방향에서 그 해결이 모색되어야 한다’(Daum 백과사전)는 것이 니버의 결론이다.

 

5. 도덕적인 개인을 비도덕적인 조직으로 전화(轉化)시켜 버리는 수많은 집단(계층, 지역, 세대 등) 중에서 니버가 가장 주목하는 대상은 국가다. 니버에 의하면 국가는 ‘합리적인 지성과 정신보다는 폭력과 감정에 의해 유지되는 결사체’다. 그는 ‘국가 내부에서 나타나는 자기 비판의 여러 경향들조차 지배 계층과 사회 자체의 통일 지향적 본능에 의해 차단된다.’며 ‘그 결과 세계 각국에서는 진정한 도덕적 이상주의(moral idealism)와 저열한 도덕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도덕적 반역자와 형사범을 함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해 버렸다’고 분노를 터뜨린다. 이런 점에서 니버가 그의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근대화론자 타이렐(Tyrell)의 통찰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이렐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가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그 자아는 독선적이고 교만하며 자기 만족적이고 이기주의적일 것이다.” (130쪽)

  니버는 또 또 국가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특징은 아마 위선(hypocrisy)일 것이라며 국가의 정직성과 일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니버는 자기 기만과 위선을 ‘도덕성이 비도덕성에게 바치는 뇌물’이며 ‘소아가 충동과 모험에 빠져들기 위해 대아로부터 동의를 얻어내는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때의 충동과 모험은 스스로 기만할 때에만 합리적 자아가 승인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기만이 외부 관찰자의 눈만을 속이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으레 그렇듯이 자기 자신까지 기만하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말이다.

 

6. 니버의 통찰과 혜안을 보여주는 단락을 몇 인용하며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자.

 

1) ‘자유방임주의(laissez faire)'가 산업시대에 유지되는 까닭은 사람들이 전체의 복지는 경제 활동에 가능한 한 최소의 정치적 제약을 가해야만 더욱 개선될 수 있다는 무지한 신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백 년 간의 역사는 바로 이 이론이 반박되는 역사이다. …(중략)… 이런 가식적인 이론이 계속 지탱되는 이유는, 그 이론을 현대 산업 생활에 적용함으로써 생겨나는 불의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무지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생활이 사회적 무정부 상태 및 이 이론이 옹호하는 정치적 무책임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63)

 

2) 동물의 경우에 자기 보존 본능은 자연에 의해 제공되는 필요성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동물은 배고프면 죽이고, 위험을 느끼면 싸우거나 달아난다. 반면에 사람의 경우, 자기 보존의 충동은 세력 강화에 대한 욕구로 쉽게 전환된다. 인간의 자기 의식에는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켜 주는 병적인 특질이 들어 있다. 자기 의식이란 무한성 내에서 유한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은 ‘자아(ego)'를 광대한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보잘것없는 점으로 인식한다. 모든 살아 있는 자기 의식에는 이러한 유한성에 대항하려는 표지가 있다. 자기 의식은 종교적 차원에서는 무한성에 흡수되려는 욕구로 나타나고, 세속적 차원에서는 인간 자신을 보편화하여 자신의 삶에 자기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제국주의의 근원은 모든 자기 의식에서 찾아져야 한다. (74)

 

3)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큰 사회 집단들, 즉 공동체, 계급, 인종, 민족 등은 사람들에게 자기 부정과 자기 확대의 이중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충분히 진행된다. 애국심이란 보다 저급한 충성심이나 지역적 충성과 비교해 볼 때, 높은 형태의 이타주의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 전망에서 보면 한갓 이기주의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81)

 

4) 초대 교회에서는 노예도 평등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시민적 자유를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회는 경제적 힘을 가진 세력들이 노예를 중세의 농노로 만들 때까지 노예 제도를 방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개개의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의 노예들을 해방시켰다는 사실은 복음의 원리가 사회적․정치적 정책들을 고무하기보다는 개인을 감화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오늘날 종교적 공동체들과 교회는 그 조직체 내에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초월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 자신들의 종교적․도덕적 이상과 대립되는 보다 큰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격렬하게 맞서지 않는다. (116)

 

5) 일반적인 지식 수준은 앞으로 수십 년 혹은 수세기를 거쳐 크게 높아질 것이며, 이렇게 높아진 사회 의식이 국가의 태도를 바꾸게 되리라고 바라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연 대중의 지식 수준이 국제 관계에서 도덕적 난맥을 제거할 만큼 충분히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못 의심스럽다. 신랄하고 예리한 분석을 거부하는 애국심에는 윤리적 역설(ethical paradox)이 내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애국심은 개인의 희생적인 이타심을 국가의 이기심으로 전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133)

 

6) 이들(특권계급)이 더욱 선호하는 방법은, 자신들이 큰 이익을 보고 있는 기존의 사회 조직을 사회 일반의 평화나 질서가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는 조직인 양 선전하면서 자신들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는 그 본성상 질서를 원하고 분쟁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권 계급의 그 같은 방법은 불공정한 ‘현상’을 유지함에 있어 매우 강력한 수단이 된다. 지금까지 그 어떤 사회든 간에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부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은 언제나 평화를 위협한다는 도덕적인 비난을 받게 되는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설사 정의를 쟁취하려는 노력이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수행된다 할지라도 특권 계급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을 도덕적으로 불리한 궁지로 몰아넣으려 할 것이다. 특권 계급은 그 같은 노력이 불안정한 균형 상태를 파괴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결과로서 나타날지도 모를 무정부적 혼란 상태를 두려워하는 척한다. (180)

 

7) 브룩스 애덤스(Brooks Adams)는 사법부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치란 다수를 점하는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투쟁이다. 헌법은 (……) 판사들에 의해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기능은 본질상 정치적이므로, 수세기 동안 그렇게 제거하려고 노력했던 그런 성질의 압력이 판사들에게 가해진다. 미국의 대법원은 애초부터 가장 치열한 논란이 되었던 정치적 이슈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정치적 승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도구가 되었다. 결국 대법원은 언제나 공공연하게 당파성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188)

 

8) 이성이나 지성은 궁극적으로 계급적 이기주의를 철폐할 수 없다. 데이비드 흄은 이기주의가 인간 본성의 유일무이한 경향은 아니지만 지배적인 경향이기는 하다는 격률이 실제로는 진리가 아니지만 정치 현실에서는 참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이 격률이 정치 현실에 있어서 진실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집단 행동은 언제나 다수 의견에 의해 좌우되는데, 대다수는 항상 이기주의적 동기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196)

 

9) 레닌은 “(중산층 민주주의의) 이 같은 제약들로 인해 무산자는 정치적 민주주의 참여에서 소외당하고 배제된다. 마르크스는 코뮌(commune)의 경험을 분석함에 있어 민중은 몇 년만에 한 번 정도 자신들을 억압하는 계급의 사람들을 대표로 선출하는 순간에만 정치적 자유를 누릴 뿐이라고 했는데, 그의 이 말에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실제로 현대 민주 제도에 있어 소유 계급의 권력에 대한 편견 없는 분석, 입법의 독점, 애매한 법조문의 편의에 따른 해석, 목적 달성을 위한 불법적․탈법적 행위의 공공연한 자행 등을 생각해 볼 때, 공산주의자들의 그 같은 비판에 대해 반박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6)

 

10) 그(마르크스를 말함)의 경제 이론 중의 하나인 노동가치설은 그렇게 완벽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기존의 가치 체계를 뒤집어엎으려는 '가치전도(transvaluation)'의 시도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노동 계급의 열악한 상태를 궁극적인 지위 상승의 근거로 삼고, 그들의 사회적 불행에서 최후의 승리의 징후를 찾아내고, 일체의 재산권 상실에서 어느 누구도 소유의 특권을 갖지 않는 장래의 문명을 발견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위대한 희곡이나 고전적인 종교에서처럼 패배로부터 역설적으로 승리의 가능성을 도출해낸다.

  니체가 기독교를 노예들의 반란으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 특유의 온유와 용서의 도덕에서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에게 도덕적 이상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한 복수극을 본다. 이러한 도덕적 이상은 약한 자, 피지배자의 덕은 인정하는 한편 도덕적 중요성을 갖는 전통적인 덕을 강한 자, 지배자로부터 빼앗아버리는 유효한 도구이다.

(212~213)

 

11) 경제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힘(주로 파업이라는 무기)은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기에는 그리 적합치 않다. 왜냐하면 갖가지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힘은 지배 계급의 영향력 아래에서 파업의 힘을 약화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국가에 의해 약화된다. 노동쟁의에 대한 연방 정부의 규제, 강제적인 중재, 계엄령 선포, 파업 차단을 위한 군대 투입 등은 국가가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많은 방법들 중에서 극히 일부분의 예를 든 것이다.

  이러한 정치 권력의 강압적인 탄압이 없더라도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경제적 무기는 그리 강하지 않다. 게다가 그것은 점점 약화되어간다. 노동자들은 분쟁이 일정 기간 계속되면 자본가의 경제적 자원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노동 계급은 굶주림에 굴복하게 된다.

  생산 과잉으로 빚어지는 공황은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위협하여 파업이라는 최후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끔 부추기며, 또 한편으로는 파업노동자들을 대체하고도 남는 실업자군(群)과 궁핍한 사람들을 양산해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자동화 장비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은 기계에 뒤떨어지게 되어 일자리를 수없이 잃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노동력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숙련노동자가 아니라 반숙련노동자이며, 이들을 교체하는 일은 이제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산업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경제적인 힘만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바위에 계란 치기나 같다. 이제 이런 약점을 보완하려면 노동 계급은 필연적으로 정치 권력도 소유해야 한다. (274~275)

 

12) 사회의 관성이란 워낙 견고한 것이어서, 관념적으로나마 그것을 이겨낼 수 있으리란 확신 없이는 그 힘을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순수하고 공정한 사회가 도래하리라고 믿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급격한 사회 변혁의 과정에 내포된 위험과 고통을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확신이나 환상은 광신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위험한 반면, 이런 환상을 포기하면 타성에 젖어버릴 것이란 점에서 위험하다. (300)

…(중략)…

  합리적으로 원화된 이상주의 바로 곁에는 기회주의가 있고, 기회주의의 바로 곁에는 현 상태에 대한 부정직한 굴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절대주의나 열광주의가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필요하다. 개인적 상황에 적용하건 사회적 상황에 적용하건 절대주의자나 열광주의자가 자신들의 절대적인 이상, 즉 역사에서의 급진 세력의 빛에 비추어 언제나 타협을 내포한 직접적인 성과들을 비판하고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부터 이들은 완전한 상대주의(complete relativism)의 늪 속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302)

 

13) 이 같은 비폭력의 정신이 동양의 한 종교 지도자(간디를 말함)에 의해 현대 정치에 도입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역사적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서양인은 동양 사람들에 비해 야수성이 강하고 더욱 잔인하며, 설상가상으로 서양의 종교적 유산은 서구 문명의 기계적 성격으로 인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통찰은 거의 대부분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특권계급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특권 계급은 기독교의 통찰을 감상적으로 만들어서, 스스로의 자원을 이용해야 하는 소외 계층 사람들이 그 통찰에 나타나는 도덕적 혼란을 명확하게 인식해 버린 결과, 그들은 사회적 갈등을 풀어가는 데 있어 더 이상 기독교적 통찰들을 이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기독교적 통찰을 이용할 수 없게 되는 순간부터 서구 문명은, 그것이 파국을 향해 달리건 아니면 점진적으로 경제 생활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여 파국을 피하건 간에, 본래적인 잔인성으로 인해 병들고 있으며 인간 생활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증오심에 시달리게 된다. 설사 사회 정의가 비폭력적 요소가 없는 사회적 투쟁에 의해 달성되었을지라도, 이렇게 해서 달성된 사회의 성격에는 뭔가 결핍된 것이 있다. (343~344)  ♣

 

 

출처 : 강철무지개
글쓴이 : 강철무지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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