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아내와 같이 이대 ECC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후, 지난 2월 정식으로 개봉된 영화 <이다>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누구인지를 묻는 정체성과 관련된 영화이기도 하고, 또 종교적으로 완전히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의 주인공이 엮어 가는 수작의 영화이면서 흑백 영화의 아름다운 영상미도 감상 포인트라는 신문의 영화평을 오래 전 읽은 기억이 나서, 개봉하면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영화였습니다.
영화 내용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1960년 소련의 위성 국가인 공산국가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고아를 보살펴주는 수녀원에서 자란 예비 수녀 안나가 예수님 조각을 만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외부와는 철저히 단절된 수녀원, 그리고 추운 겨울에 고아들과 수녀들이 절제된 규율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광경들을 카메라의 앵글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 어쩌면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려는 의도적인 장면일 것입니다.
어느 날 3 명의 예비 수녀 중 한 명인 안나는 나이 지긋한 선배 수녀에게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넌 고아지만 혈육인 이모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모에게 수차례 연락을 했지만 수녀원으로 오지 않는다면서 한번 직접 찾아가보라고 권합니다.
수녀 서원식을 며칠 앞둔 안나는 수녀가 되기 전에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를 찾아 갑니다. 이모 완다는 담배를 물고 항상 술을 찾는, 어쩌면 자유 분방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안나가 찾아 온 그 순간에도, 남자와 잠자리를 한 후 막 일어난 모습입니다. 반면 안나는 수녀원에서 훈련받은, 철저히 종교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첫 대면을 합니다. 나이 든 이모와 어린 조카, 두 혈육은 비록 서로 인사는 나누었지만 수년간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저 남 보다는 가까운 사이일 뿐 어색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모 완다는 수녀가 되려는 조카 안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너의 이름은 안나가 아니라 ‘이다’였으며, 폴란드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진짜 이름과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안나는 수녀다워서 그런건지 아니면 그게 무슨 대수야 라는 태도인지는 몰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곤 곧바로 수녀원으로 돌아가려는 안나, 아니 이다에게 이모는 묻습니다. 부모님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그래서 이다와 이모 완다는 함께 부모가 묻혀 있을 법한 전쟁 전에 살던 집이 있는 고향으로 허름한 자동차를 타고 떠납니다. 영화 <이다>는 조카 이다와 이모 완다가 이다의 부모, 정확히 말하면 완다의 여동생과 제부가 묻힌 곳을 찾아가는 과정이 내용의 전부입니다.
말하자면 영화는 지금 수녀가 되려고 하는 안나는 진짜 누구인지를 찾는 진정한 정체성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또 한 가족의 삶의 역사로는 그녀의 부모들이 유태인으로서 폴란드 땅에서 전쟁을 겪으면서 어떤 비극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이기도 함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로드 무비 형식으로 풀어가는 영화의 전개 방식이라, 등장 인물도 이다와 완다 이외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섹스폰 연주자인 젊은 청년과 그의 연주 음악들이 전체적으로 우울한 영화의 분위기를 조금 업시킬 뿐 지루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장면이 바뀔 때 마다 음향을 섬뜩하리만큼 크게 믹싱해서 졸리운 관객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전개되면서 이모 완다와 조카 안나의 미묘한 갈등 뿐 아니라 영원히 역사에 묻히고 말았을 한 가족, 아니 유태인들이 겪었던 아픔의 역사가 낱낱이 밝혀지면서 갈등의 대립 구조는 긴장감을 더하게 됩니다.
이모 완다가 어린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여동생인 안나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다는 사실, 그리고 안나의 부모들이 폴란드인들에게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될 때 그 아들도 함께 살해되었다는 사실 등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유태인들이 겪었던 아픈 사연, 아니 안나와 완다의 가족들의 사연이 들춰내지면서 긴장감은 클라이막스로 치닫습니다.
성녀 같은 이다(안나)와 항상 담배를 물고 술을 먹고 운전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리고 세상의 때는 다 묻히고 사는듯한 이모 완다의 삶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가 잡고 있는 갈등의 대결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 둘이 삶의 세계관 내지는 종교적인 태도에서 보이는 첨예한 갈등 양상은,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완다가 이다의 성경책을 만지려고 하자 이다는 신경질적으로 성경책을 빼앗는 장면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침대에 누우면서 안나에게 한마디 던지듯이 말 합니다. "해보지도 않고 헌신을 약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이다와 완다는 짧은 여행을 통해서 완다의 아들과 이다의 부모를 유대인의 묘지에까지 가서 묻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안나는 다시 수녀원으로, 완다는 여전히 남자들의 품에 자신을 맡기면서 술에 취해 살아가는 일상으로.
그러나 이 영화는 약간은 충격적인 반전으로 서둘러 끝을 맺습니다.
자신 속에 있는 슬픔과 고통을 숨기고, 겉으로는 강하게 살아왔지만, 완다의 내면에는 해결되지 않은 그녀만의 엄청난 혼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절대로 해결되지 않은 정체성의 혼란 말입니다. 결국 그녀는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안나가 수녀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는 서원식날, 비극적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이모 완다가 갖고 있는 종교관이요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평생,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속이고, 폴란드 혁명 동지회에서 열심히 열심히 자신을 숨기고 살아오면서, 인생의 온갖 경험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결국 진정한 삶의 정체성이 장례식에서 조차도, 그녀의 진정한 모습은 가려진 채, “우리들의 영원한 동지”였다고 읊어대는 허무하고 공허한 의식(儀式)밖에 남는게 없다는 것을 카메라 앵글은 놓치지 않습니다.
수녀원으로 돌아 온 안나는 서원식이 있는 그 날, 결국 아직까지 자신이 준비가 덜 되었다면서, 이모 완다가 자살해서 죽은 아무도 없는 집에 와서, 이모가 입었던 옷, 신었던 구두 등을 걸치고 섹스폰 연주자 청년을 찾아가 격정적인 정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두 남녀의 대화는 이어집니다. 이렇게 사랑하게 되고 섹스하고 아이 낳은 후에는 뭘 하게 되는거거냐고. 남자가 대답합니다. 집을 짓고 그냥 살게 되는거지. 여자가 또 묻습니다. 그 다음은?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우리에게 던지려고 하는 질문은 바로 이런 복합적인 차원의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정말 내가 맞을까? 안나가 진정한 나일까 아니면 이다가 진정한 나일까? 육신적으로 규정된 이다가 진짜 나일까 아니면 안나로 살아온 내가 진짜 나일까? 그리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삶의 온갖 다양한 경험을 다 하면서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허망하고 공허한 칭찬 한마디를 들으려고 사는 건 아닐까? 완다처럼. 그렇다면 세상의 온갖 고통을 다 등지고, 단절된 수녀원과 같은 곳,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만이 능사일까? 이다처럼.
짧은 영화, 그리고 흑백으로 된 조용한 영화 한 편을 보고 질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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