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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IVP 刊)/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요단 刊)-필립 얀시

석전碩田,제임스 2011. 5. 2. 16:51

        

 

약성경 로마서 1122절의 구절을 처음 읽으면 그 뜻이 무엇인지 갸우뚱하게 될 만큼 번역이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의 표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개역한글)  

 

슨 뜻인지 곰곰히 씹어보면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는 사도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 알게되겠지만 쉬운 표현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성경이 개정되기 전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으니 이 구절을 읽을 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건 더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  

 

립 얀시가 쓴 두 권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IVP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를 동시에 읽고 난 후 뜬금없이 로마서 1122절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왜 이 성경 구절이 생각이 난 걸까를 혼자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2000년 전,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지금의 터키 지방을 걸어서 샅샅히 누빌 때의 사도 바울과 지금 이 시대, 2000년이 지나 첨단 과학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 책을 쓰고 있는 필립 얀시의 이미지가 마치 유비(喩比)처럼 마음 속에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제사 제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동물의 피를 뿌려 제단에 드려야 했던 유태인의 제사 전통은 율법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제사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소통, 즉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었지만, 역사와 세월이 지나면서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관습과 제도로 변하여 결국 <소통><사랑과 용서>는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인간과 직접 소통하시려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지만 그를 받아들일 공간은 좀처럼 없었던 것이지요. 아니 공간이 없었다기 보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복음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신데, 수만가지 규율과 제도, 원칙과 율법의 조항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복음이 왔지만, 이 세상은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또 알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112절은 " 이 세상은 은혜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배척하였으나,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러나 이렇게도 간단하고 단순한 은혜의 복음이 선언된 지 2000년이 지났지만 왜 아직도 사람들이 이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일까요? 은혜의 향기를 발하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대로 비은혜의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요? 바로 이 고민이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했던 고민이며 오늘 날 필립 얀시가 했던 고민이이라는 것입니다  

 

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하소연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든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라디아서 31~2)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하소연 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린도후서 114)  

 

시가 말한 것 처럼 우리는 너무도 쉽게 율법적이고 규범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는 존재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용납하고 수용하는 태도 보다는 판단하고 비판하며, 내가 갖고 있는 기준으로 정죄하려는 경향이 본능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혜에 목말라 있다. 고든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했다.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 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 이것은 교회가 맡아야 할 절대절명의 사명을 지적한 말이다. 세상에 교회말고 은혜를 찾을 곳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은혜에 대한 목마름. 이것이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아닐까?]('놀라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 하면 맨 처음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낙태금지를 외치고 동성애를 반대하며, 인터넷 검열을 주장하는 각종 시민 운동 단체가 생각난다는, 다분히 정치적 성향의 대답이 대부분이다. 은혜 근처에라도 가는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풍기는 냄새가 그와는 거리가 먼 탓이리라.(중략) 하나님의 사랑이 값 없이, 조건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개념은 인간의 모든 본성과는 상반되는 것 같다. 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카르마(업보), 유태교의 언약과 제사, 이슬람교의 법전...모두 노력으로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만나는 것은 기독교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도...]  

 

*  

 

, 사도 바울이 설명하는 은혜의 복음 부분인 로마서 1122절로 되 돌아가 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이 구절을 오늘 날 필립 얀시라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은혜의 법칙과 비은혜의 법칙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인간 본성 상 비은혜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은혜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비은혜의 세상 가운데 은혜의 법칙은 나약하고 힘이 없으며, 결국 십자가에 죽어버리는 실패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베풀어 놓으신 구원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선언하시고 베풀어 놓으신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기만 하면 그 은혜가 우리 위에 머물러 있을텐데 말입니다"라고.  

 

렇다면 은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윤리나 규율, 율법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놀랍게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흠 투성이인 나를 벌써 사랑하고 계심을 깨달아, <은혜의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맛 본 사람은 길 잃은 영혼들을 더 이상 '저 악한 자들' 내지는 '내 도움이 필요한 가련한 자들'로 보지 않습니다. 은혜가 가르쳐 준 것은, 하나님이 우리 모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 자신을 인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자격이나 조건 따위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근 한국교회에는 <비유풀이 교리> 같은 엉뚱한 거짓 가르침으로 어느 특정한 사람을 예수의 영이 임한 이 시대의 구원자라고 속이는 이단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은혜의 향기를 발하기 보다는 율법과 규율, 원칙과 자기 열심, 자기 노력 등 비은혜의 요소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이런 말기 현상을 자양분(滋養分)삼아 독버섯처럼 기생하고 있는, 분명한 사탄의 세력입니다. 진정한 은혜를 갈망하다가 비슷하게 생긴 가짜에게 거짓 은혜의 맛을 봤다고 생각하는 그들이기 때문에, 비은혜로 가득한 한국 교회의 현실로는 상대하기가 벅찬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유일하신 구세주이십니다. 저는 이런 현실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게 준 가장 큰 시련이면서, 또 선명한 은혜의 복음으로 스스로 정화되도록 촉구하는 시험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런 때에, 은혜를 사변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한 게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비은혜와 은혜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 쉽게 풀어 쓴 필립 얀시의 두 권의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를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