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골목길에서 늘 폐휴지나 박스를 수거해 가시는 늙으신 노인 한 분이 계십니다. 예사로 지나친 지 몇 해, 어느 날부터인가 그 분의 존재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배출하는 날이면, 일부러 신문지나 박스들은 따로 놔두었다가 그분이 오시길 기다렸다가 드리곤 하지요. 제가 그 분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정도의 배려밖에는 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영화 <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봤습니다. 그동안 골목길에서 늘 봐 오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친근감이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노인 분이 묵묵히 리어카를 끌면서 박스나 폐휴지를 수집하는 일, 매일 새벽마다 은은한 오토바이 소리를 내면서 조간 신문을 돌린다든지 우유를 배달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동네 어귀에 있는 허름한 주차장 시설에서 무료하게 손님을 기다리는 주차 관리원.... 그저 관심 밖의 그 대상들에 카메라의 앵글을 들여대, 그 분들을 우리의 관심 안으로 크게 클로즈 업하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묘미입니다. 아니, 그저 단순하게 클로즈 업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작은 배려 밖에는 할 수 없었던 우리들에게, 그 분들에게도 삶의 무게가 흠씬 묻어있는 소중한 삶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면서 그 분들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초대해 줍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객석 이곳 저곳에서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공감하게 하고 또 그로 인해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우리 자신을 일깨우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입니다.
퇴근 후 이른 저녁을 먹은 후, 가까운 영화관을 찾아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감상을 하고 온 다음 날 새벽, 일찍 잠이 깨서 이불 속에서 어제 저녁에 봤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 영화 보면서, 감독이 뭘 말하려고 했다고 생각해?'
'글쎄, 매일 지나치면서 만나는 사람이지만, 그저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삶의 스토리 조차도 없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소중한 삶의 이야기가 있다는 걸, 삶의 막다른 마지막 구간을 달려가고 있는 노인들의 눈을 통해서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두런 두런 시작된 이야기는 금새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 마무리 되고, 어느덧 창밖은 환하게 밝아옵니다. 또 일상의 하루가 시작이 됩니다.
*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은 텔레비젼에서 방송하는 주말 가족 드라마를 연속해서 한꺼번에 본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하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연로한 부모를 서로 모시지 않으려고 젊은 며느리 동서가 제각각 자신의 사정을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들이 밉다기 보다는 오히려 팍팍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젊은 사람들의 삶이 이해됩니다. 병든 부모를 잠시 들여다 보고 골목길을 황급히 빠져나가는 자녀와 손주 손녀들의 무표정함 속에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삶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를 웅변하는 듯 합니다. 노부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례식장 빈소에서, '호상'이느니 '자식들을 위해서 일찍 돌아가신 게 다행'이라느니, 나름대로의 논리들을 풀어 대면서 삶을 아는 척 논하는 사람들에게, '뭐가 호상이냐!'고 일갈하는 이순재(김만석 분)의 호통이 통쾌하다 못해 비감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여태껏 저도 나이 많아서 돌아가신 분의 빈소를 찾았을 때에는 '호상'이라느니 하는 망발을 서슴없이 해 왔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아직도 영화의 감흥이 잔잔하게 마음 속에 남아 있습니다. 혼자보다는 부부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족들과 함께 감상하는 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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