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상영중에 있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는, 상담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특별히 시사하는 바가 있는 영화일 것 같다. 어릴적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지 못해 자살을 꿈구는 한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또 다른 상처받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 보게 되고, 결국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받게 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는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로 줄여서 표현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장기간 베스트셀러 순위에 랭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원작 소설을 접한 상태에서 영화
제작이 시작되었고, 원작의 플롯과 등장하는 캐릭터들- 환경의 부조리함에 치이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희생당하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희생양으로서의 캐릭터와 강간의 경험으로 세상에서 갇힌 여성 캐릭터-은 이미 대중문학에서 닳을대로 닳은 유형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상 너무나 익숙해진 플롯 그 자체만 두고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접근한다면 얻을 수 있는 감흥은
별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그런 '식상하고 익숙한' 플롯을 극복하기 위한 참신하고 파격적인 시도도 굳이 하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렇게 식상한 플롯을 지닌 고만고만한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러한 이야기를 캐릭터의 감정에
진정성을 있는대로 이끌어내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해서 진심을 울리게 하는 내공에 있다. 즉, 다소 인위적인 면이 있는 기존의 플롯을
굳이 탄탄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무리한 장치를 더 집어넣기보다 핵심적인 주제에 공감할 수 있는 영화 속 공기(정서)를 조성해서 머리로 계산하기보다
감정으로 깊숙히 받아들이게끔 하는 영화적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공법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알면서도 새삼
마음을 아리게 만들 정도로 진심어린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들일테고, 인간군상의 디테일까지 파고들어 평면적인 캐릭터에도 깊이와 감정을 부여하는
재능을 지닌 송해성 감독이 그 입지에서 던질 수 있었던 접근법이기도 하다.
연민의 정서를 통한
소통과 치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그 찬란한 기적'이라는 이 영화의 카피에서 '사랑'을 단순히 기존 멜로영화의
남녀간 '정분'의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면 의아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의 종류를 '~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두가지로 분류한다면 전자는 동경이 전제되어있고 후자는 연민이 전제되어있다. 동경으로서의 사랑이 조건적이고 (그래서
유한하며) 개인적이고 열병을 부르는 감정이라면 연민으로서의 사랑은 공감하게 하고 상대방에게 서로 손을 내밀게만들며 소통을 부르는
감정이 된다. (예수께서 행했던 사랑 역시 불쌍하고 소외당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랑이었다)
영화 '우행시'를
관통하고 있는 정서는 그중에서 연민으로서의 사랑이다. 윤수는 어린 시절부터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배신당했다고 여기며 홀로 죽음을
고대해왔고 유정 역시 강간의 상처를 더욱 깊이 패어 낸 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그 연줄로 대학강사를 하는 처지이고, 가족들 어느 누구도
자신과 소통해주는 이가 없기에 스스로 조소하고 자해를 한, 두 사람 모두 세상으로부터 소통이 끊긴 이들이다. 극 중 모니카 수녀가 '두 사람이
닮았다'고 말한 것은 (실제로 두 배우의 외양이 닮기도 했지만) 소통을 단념한 채 상처를 끌어안고 침전하기만 하는 윤수와 유정의 캐릭터가
대칭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만을 바라보고 살던 윤수와 유정이 공감대를 느끼는 것은 고립된 인간끼리의 동질감이며 두 사람간의
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공감대에서 출발한다. 대화를 시작하며 서로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고 그 후 상대방에 대한 연민이
두터워지면서 유정은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윤수에게 건네고 윤수는 밤새 십자가를 갈고닦아 목걸이를 만들어 건넨다. 두
사람의 연민에서 출발한 사랑이 본격적인 소통을 만든 것이다.
우울증 상담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느꼈겠지만 실제로 의사나 상담사가
직접 어떤 특별한 조언을 해주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 후, 환자가 오열을 하고 발을 구르는
와중에도 조용히 휴지를 건네거나 맞장구쳐주며 들어주기만 할 뿐이다. 반복되는 상담에서 환자는 자신을 억누르는 경험에 대한 똑같은
얘기를 몇번씩 울면서 반복해서 털어놓고 그렇게 반복하면서 그 경험이 더 이상 당사자에게 짖누름으로 다가오지 않게 될 때,
우울증에서 벗어나 치유되는 것이다. 대화와 소통이 지닌 치유력은 그런 것이다.
대사를 빌자면 '나에게 우주만한 상처'도 입 밖으로
내고 누군가의 이해와 공감을 얻을 때 더 이상 나를 억누르지 못하는 '먼지만한 상처'로 무력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면회실에서 과거의 비밀을 고백한 유정이 덤덤하게 눈물을 훔치다 "말하고 나면 정신이라도 잃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네" 라고
중얼대고 그 날 이후 처음으로 잠을 설치지 않고 푹 잠들었다고 말했던 것은 소통이 가져오는 그러한 치유력에 대한 적절한 묘사이다.
용서의 힘
영화에 등장하는 용서의 모습은 전반부의 삼양동
할머니의 용서 장면과 후반부 유정이 어머니의 병실에서 흐느끼며 어머니를 용서하는 두 군데에 등장한다. 영화에서 소통을 통한 인간의
변화에 주력한 탓에 용서의 문제에 대한 비중이 확연히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선상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
일찌감치 두 사람의 만남 전에 배치해두고 짧게 편집해버린 삼양동 할머니의 용서 장면은 클라이막스에 놓여 충분히 눈물샘을 자극했으면
하는 아쉬움섞인 비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의 전체적 맥락에서 초반 할머니의 용서 장면은 이후 일어날 일종의 '기적'의
단초로 배치되어 초반의 신파적 강도와 비중을 의도적으로 낮춘 것으로 보인다. 삼양동 할머니의 용서는 일단 자신을 누르던
복수심과 원망의 감정을 흘려보내고 증오의 속박에서 스스로를 풀어주게끔 한다. 이러한 변화는 성모마리아상을 가리키며 울음을 참지못했던
원통했던 눈빛이 용서를 한 이후 차에 타고 올라오는 길, 분노가 정화된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간단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에서 이
장면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윤수의 변화, 서툴게나마 소통하려는 시도,의 계기로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적의 신호탄이 된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 말미, 유정이 증오해마지않던 어머니의 병실로 달려가 "나 엄마 용서하려구... 죽기보다 힘든거 그거 하면 하느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지 않을까해서" 라고 말한 것은 유정이 삼양동 할머니의 용서 이후 윤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이루어진 기적의 목격을 통해 자신의 용서를
통한 또다른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용서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바꾸는 기적
그래서 윤수의 세례 장면에서 신부가 윤수에게 건넸던 "물고기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사람이 변하는 게 기적" 이라는 말은 이 영화의 메인테마를 나타내는 문구로 봐도 좋을 듯 하다.
유정은 자신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웠던 열다섯 살 상처입은 소녀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윤수에게 속을 털어놓기 시작하면서 교도소 찬 바닥에서 밥을 먹는 다른 이를
생각하고,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다른 이를 위해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이 우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하루빨리
죽기만을 기다리고 모니카 수녀의 관심도 내팽겨치던 윤수가 소통의 대상이 생기면서 사람을 믿기 시작하고, 좋은 것을 믿기 시작하고,
목요일을 기다리고, 유정을 기다리며 살고 싶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윤수와 유정이 만나면서 가장 삶을 버리고자 했던 이들이
변화하는 '기적'을 목격하게 되고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윤수가 사형에 처해질 때, '모두가 자신을 외면한다고 생각했지만 사랑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는 윤수의 고백, 일종의 기적의 '선포'와 같은 유언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함께 서러워 질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
영화는 사형의 부당함과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역설했다기보다 '사람이 사람을 처벌하는 행위'보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적'의 가능성에 집중해줄 것을 호소하는 휴머니즘적 메시지를 전달한 것에 더 가깝다.
원작과 다르게 윤수가 실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분명히 밝히면서 '판단 오류로 인해 전혀 죄가 없는 사람도 사형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오래된 사형폐지론의 근거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며 민감한 찬반론을 피해간 대신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형집행관과 동료사형수, 이주임과 같은 인간적인 교도관 등을 등장시키며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전반적 인물상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이끌어 낸 것이 이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데드맨워킹'이나 '그린마일'과 같은 접근법을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민감한 사회이슈를 교묘하게 피하고 사형수에 대한 나이브한
미화로 그려낸, 통속적이고 감정적으로만 어필하는 어정쩡한 사형반대론으로 다가와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고 얄팍한 이도저도 아닌 멜로영화라는
비난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형집행날 윤수가 복도를 나서면서 창밖으로 향하는 시선에서 시작하여 애국가를 부르다
'무서워요'라고 울부짖는 윤수와 이를 지켜보는 유정의 울음까지 마지막 시퀀스가 보여주는 디테일적 치밀함과 집중력이 일으키는 호소력은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며 이 영화가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의미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매주 목요일을 기다리는 극중 남자 주인공 윤수처럼, 우리 생명의 전화 31기 후반기 교육도 매주 목요일 진행되고 있는데, 매주 목요일이 그런 날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다음 주 웤숍 시간에는 그룹원들에게 이 영화를 같이 한번 보자고 권해야겠다.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 뿐 아니라, 그 구성과 소재, 그리고 엮여진 이야기들이 잘 진행 된 한 건의 상담 케이스라는 생각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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