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행후기

[스크랩] 터키 여행기(4)

석전碩田,제임스 2005. 11. 22. 23:30
회복되어야 할 땅 터키

① 고난의 현장-갑바도기아
② 심판의 진행-소아시아 7교회
③ 실력-로마제국 기독교의 성쇠

# 영지주의의 중심무대 에베소


소아시아 7교회 중 눈길을 끄는 곳,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규모가 크고 넓게 포진해 있는 각종 유적이 있는 에베소는 여러 면에서 집중해 봐야 할 곳으로 보인다. 에게해안에서 5km 부근에 자리한 에베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잠시 전도했고(행 18:19),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며 성령이 강림하여 예언도 하고 희한한 이적을 많이 행하자 이것을 본 마술객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예수를 믿었다(행 19:1~10)는 곳이다. 또 마게도냐로 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밀레도에 이르러 이곳 장로들을 청하여 ‘너희는 깨어 내가 3년간이나 눈물로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고 권면한 기록(행 20:17~30)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사도 요한은 이곳에서 감독직을 수행했고,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를 저술했으며, 밧모섬에 유배 가서 계시를 받아 일곱교회에 보냈다(계 1:11).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부탁하신 말씀에 따라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으며, 마리아는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요한 또한 여생을 보냈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이곳에 있는 교회에 편지했다(엡 1:1). 디모데, 아굴라, 브리스길라, 아볼로, 두기고, 드로비모 등이 이곳 교회의 교역자였다.
터키에는 곳곳에 그 옛날 로마, 비잔틴시대의 족적이 얼마나 장대했음을 알게해 주는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에베소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기독교와 관련있는 대표적인 곳으로는 7~8세기에 건설된 일명 ‘요한의 문’이라고 불리는 박해의 문이다. 또한 사도 요한을 기념해 지은 사도요한기념교회,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기념한 마리아기념교회가 어느 정도 복원이 돼서 그 형태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에베소에는 일반적으로 로마제국의 규모를 가늠하게 해주는 2~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노천극장, 그리고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전각이 있다. 에베소인들은 정신병자에 의해 불타버린 아데미 신당을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게 지어 자존심을 세웠다고 한다. 아데미 여신상을 비롯해 에로스 신상, 하드리안 신전, 도미티안 황제 신전 등 건물 기둥의 곳곳에 여신과 황제들이 부조되어 있다. 대형 목욕탕, 매음굴을 통해 그 당시의 성적 문란이 어느 정도였음을 알게 하며, 여러개의 공개된 화장실에서는 정치적인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장대한 건물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셀수스 도서관이었다. 로마 시대에 지은 큰 도서관 중의 하나로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여 헬라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나 헬라크리트의 학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도서관의 규모를 통해 에베소의 학문 수준이 당대 최고의 도시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도시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마술사들이 자기들의 책을 태우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의 전도에 하나님이 얼마나 강력하게 임하게 하셨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대목이다.


두란노 서원 앞에서,  2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원형극장, 대리석으로 포장된 도로


# 바울이 걸어서 간 앗소, 드로아
우리 팀의 차량은 버가모에서 왼쪽 지중해안 쪽을 따라 죽 달렸다. 가이드는 질문을 던진다. “왜 사도 바울이 배를 타지 않고 굳이 걸어서 이 길을 걸었을까.” 사도행전 20장 13절에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는 말씀이 그 질문을 뒷받침하고 있는데,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앗소는 신전이 몇 개 있을 정도로 매우 큰 도시였기 때문에 전도를 하기 위한 열정에서 힘겹고 불편할지라도 그것을 이유로 하지 않고 도보를 택했다는 설명이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유두고 소년을 회생시키고(행 20:7~12), 일단 도보로 앗소까지 왔다가 이곳에서 배를 타고 미둘레네로 행했다(행 20:13~14)고 한다. 앗소에 있는 작은 마을 어구로 들어가니 헬라 때의 망대와 터키 사원, 교회 등이 유적으로 남아 있고, 교회터에는 자그마한 돌기둥과 돌무더기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고, 대지는 푸른 초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고, 야생화들은 그 색깔과 모양이 선명하게 뽐내는 듯한 자연들을 품에 안은 채 터키에서의 7 일째 시간은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앗소 다음 코스는 드로아. 왕복 2차선 도로에 팻말이 있는데, 거기가 드로아이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8~9)고 했던 그곳. 바울은 이곳을 최소한 세 번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차 전도여행 때 북쪽 비두니아 지방으로 가려다가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아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에 환상이 나타났고, 마게도냐인의 초청을 보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여 유럽 전도 길에 오른 것(행 16:6, 10)으로 알려졌다. 또 그는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떠나 사모드라게로,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갔으며, 3차 전도여행 귀로에 드로아에 왔을 때 7일간 체류하며 집회를 했는데 집회 중에 졸다 떨어져 죽은 유두고 청년을 살려내기도 했다(행 20:6~12).
관심이 없는 이들은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지만, 드로아를 찾아 달려온 탐사팀들은 그 흔적을 찾아 나무와 풀이 우거진 곳을 헤쳐 올라갔다. 목욕탕, 극장, 그리고 교회가 있었을 법한 유적 등은 성벽 흔적이 남은 것만도 9.6km에 달할 정도다.
‘그 옛날 바울이 복음을 향해 기도하며 발로 찾아 왔던 곳, 그곳이 지금은 폐허가 되어 그 자취를 찾아야만 조금 느낄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다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한 일행의 한탄은 모든 기독인들의 안타까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오늘날 기독인들의 사명감이 더 크다는 다짐을 하면서 일행은 다나나스해협에서 큰 배에 차량을 싣고 우리는 에게해에 (간접) 몸을 띄웠다. 맑은 공기와 바람을 맞으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다음 목적지인 이름만 들어도 슬픔이 밀려오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향했다.
출처 : 忍松齋
글쓴이 : 제임스본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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