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행후기

[스크랩] 터키 여행기(2)

석전碩田,제임스 2005. 11. 22. 23:30
회복해야 할 땅 터키

   ① 고난의 현장-갑바도기아

   ② 심판의 진행-소아시아 7교회
   ③ 실력-로마제국 기독교의 성쇠

초대 기독교 신앙인들의 역동적인 발자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땅 터키. 지금은 이슬람의 영토가 되었지만 그 옛날 기독교가 1100여 년 간 더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린 역사의 현장이다.
바울의 1, 2, 3차 선교여행 경로를 발로 직접 따라가 보고, 성경에 나오는 소아시아 7 교회를 비롯해 이미 다 무너져 돌무더기가 되어버린 기독교의 유적들, 이슬람에게 빼앗겨버린 기독교 신앙의 본토를 살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를 가늠해 보는 시간으로 삼기 위해 비장한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비행시간만 12시간 가량(모스크바를 경유해서 갈 수 있는 러시아 항공과 두바이를 경유해서 가는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을 이용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 있다) 걸려 도착한 터키는 맑은 공기와 고도 1800m의 고지에서도 넓게 펼쳐진 초원과 빌딩 숲에서 보던 조각하늘과 달리 드넓고 맑은 하늘은 한국 땅에서 경험할 수 없는 신비감을 안겨주었다. 또 제국의 후예답게 외지인들에게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거리감 없이 다가서는 터키인들의 친절이 우리의 마음에 넉넉한 여유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여유도 잠시, 성지 탐사 매일의 일정은 만만치 않은 일정의 연속이었다.
이튿날 본격적으로 시작한 성지탐사, 첫 코스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전 극심한 박해를 피해 그리스도인들이 숨어살았던 갑바도기아 지역이다. 슬픔과 고난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의 현장, 일행을 맞이하듯 가랑비가 대지를 적시며 우리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눈 앞에 우뚝 선 구멍난 바위들 속에서 신자들이 살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 300년 간 지하 바위틈에 굴을 파고 몸을 숨겨 카타콤 생활을 했던 그리스도인들, 콘스탄티누스의 부름에 컴컴한 지하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그들은 자유의 빛을 받으며 어떤 감격을 느꼈을까.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지하도시를 만들고 생활터전을 삼았던 그리스도인들은 급격한 빛과 어둠의 교차로 인해 장님이 되거나 빛을 오랫동안 보지 못해 꼽추가 되는 등 고난의 세월을 땅속에서 보내며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터키 현지 가이더 김동현 씨의 설명과 함께 터키성지탐사일행의 눈앞에 영겁의 세월 동안 자연이 이뤄낸 갑바도기아의 절경이 펼쳐졌다. 갑바도기아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동북쪽으로 약 3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약 1000만년 전 세 개의 화산이 폭발해 그 화산재로 응회암지대의 거대한 고원이 형성됐고, 오랫동안 풍화작용으로 다듬어져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는 갑바도기아 지역을 1000m 고도에서 내려다보며 일행에서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곳이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으로 지하 동굴을 만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생활하며 오롯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고난과 신앙보존의 장소임을 확인하면서 탐사 일행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갑바도기아에 발을 디뎠다.
갑바도기아는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이라는 뜻으로 그동안 경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수도인 네브쉬힐(Nevshir)을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카이세리(Kayseri), 남쪽으로 니이데(Nigde)를 잇는 삼각지대를 말한다. 오늘날 주된 지역은 괴레메(Goreme)와 데린구유(Derin Kuyu) 일대가 갑바도기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성경에는 두 곳에서 언급되는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던 120명의 사람들 중 갑바도기아인에 대한 내용(행 2:9)이 있으며, 베드로가 각지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 중 이곳 갑바도기아에도 보낸 것으로 나와(벧전 1:1) 당시 이곳에서 다수의 그리스도인이 살았음을 증명해 준다.
지역 전체가 사암으로 뒤덮인 갑바도기아는 그리스도인들의 좋은 은신처가 됐다. 지하도시는 갑바도기아 지역에 무려 39개나 되는데 이들 지하도시들은 모두 서로 연결해 한 곳이 점령당할 경우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땅속에서도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네트워킹이 돼 있었다. 지하도시에는 많을 때는 200만 명 정도가 생활했으며, 발견된 지하 교회만도 1000개에 이르니 과연 초대 신앙인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현장이다. 많이 붕괴돼 오늘날에는 데린구유, 괴레메, 카이마클리(Kaymakli) 세 곳만 박물관으로 오픈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모든 곳이 보존해야 할 고적이다 보니 Open Air Museum이라는 말도 어색하지 않네요.


정교회 수도사들이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키며 은거했던 괴레메 수도원. 괴레메는 ‘보이지 않는 지역’이라는 뜻, 즉 ‘너희들은 우리를 못 찾는다’는 자신감을 갖는 곳으로 갑바도기아 지방의 가장 중심 되는 곳이다. 괴뢰메에는 기괴한 모양의 뾰족한 바위들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 모양이 특이한데 그 이름과 잘 맞아떨어진다. 바깥에서 보면 단순한 구멍에 불과하지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들여다보면 꽤 넓은 공간의 방이 나타나고 식당, 부엌, 저장고 등이 갖춰진 생활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정교회 수도사들은 이곳에서 터키 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수도생활을 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 수도사들이 생활했던 벽 집은 거주지이자 곧 교회로 365개의 교회가 괴뢰메에 현존하고 있으며, 미개발 된 곳까지 합하면 1천여 곳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바위 집에서 또 하나 일행을 매료시킨 것은 바로 프레스코 성화. 바위를 파서 집을 짓고 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려넣어 굳힌 벽화는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수도사들은 문맹자들을 위해 벽 집 내부에 예수님의 생애, 십자가 고난, 부활, 복음서의 내용 등을 담은 성화를 그려놓은 것이다. 이슬람에 정복되면서 이곳이 박물관으로 지정되기 이전 아이들의 놀이터로 방치돼 많은 부분이 훼손됐으나 아직까지도 전 세계 성화연구가들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어 20여 분 차를 타고 이동하여 마주친 거대한 지하도시 카이마클리. 좁은 입구만으로는 바깥에서 그 큰 세계를 식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무려 12층(60m)까지 내려가는 거대한 지하 도시가 형성돼 있고, 현재는 7층(40m)까지만 공개하고 있다. 이곳에서 박해를 피해 몸을 숨긴 초대 기독교인들은 서로의 돌봄 속에서 신앙의 심지를 굳게 다져갔던 것이다.
오랜 시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시절, 2천여 년 전 당시 로마 제국하에서 박해를 피해 동굴 속으로 피해 들었던 기독교인들은 어둠의 동굴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오롯이 신앙만을 이유로 그 어둠 속에서 살았고, 또 죽어갔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서 살다가 삼험한 박해가 잠시 뜸해졌을 때 밖으로 나온 카타콤 생활을 했던 크리스찬들 중에는 갑자기 태양빛을 마주하는 것도 잠깐, 장님이 되기도 하고, 빛을 받지 못해 구루병이 발병해 곱추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차디찬 바위를 매만지며 컴컴한 동굴속 삶을 견뎌야 했던 이들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울러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목숨 걸고 신앙을 지킨 초대 기독교인들의 저력을 생각하며 오늘날 안일한 모습으로 종교라는 옷을 입고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몸을 웅크린 자세로 겨우 빠져나갈 만한 좁은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여러 개의 방이 연결돼 있고 층층이 지하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다. 미로처럼 이리저리 연결된 방들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애환을 담고 있는 생활터전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주거장소, 취사장, 곡식저장고, 저수조로 추정되는 곳들이 만들어져 있고, 곳곳에 십자가 표시가 되어 있다. 빛이 전혀 들지 않는데도 이곳 지하도시에는 곰팡이가 없다. 지하 120m까지 파내려간 우물이 통풍구 역할을 했으며, 지하도시 전체를 이루고 있는 사암이 나쁜 공기를 흡수해 늘 맑은 공기가 제공됐다고 한다. 실제로 우물이라고 하는 곳에 얼굴을 디밀어 보니 냉기가 강하게 느껴져 몸이 순간 움츠러들 정도였다.

  


이번 성지탐사 일행 중 연로하신 분들이 많았던 탓에 비좁은 바위틈새 길을 한껏 웅크린 자세로 걸어야 하는 지하 탐험이 적잖이 걱정됐다. 그러나 누구 하나 힘들다는 말이 없었다. 약한 전깃불에 의지해 좁은 통로를 지나던 일행 중에 누군가가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런 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자 다른 한 사람이 “우리는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 하는 거야”라며 대답한다. 또 누군가는 “지하도시를 보면서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에 대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한다”면서 “초대교회들에 내려진 심판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진행 중인 것을 기억하며 오늘의 교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낮에는 지상에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지하로 내려오고, 또 사도들을 통해 극심한 박해소식이 들리면 지하도시에 숨어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항상 6개월 치 음식을 저장해 놓았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을 빛을 보지 못한 채 지하 동굴에서 살아야 하는 기간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로마군대의 급습을 대비해 통로 곳곳에 외부의 차단을 막을 수 있도록 비치해 둔 맷돌 모양의 돌은 유사 시 안에서 옆으로 굴려서 막으면 밖으로부터는 열거나 제거가 불가능하도록 돼 있다.
한 곳에서는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기쁨의 소리가 들리고, 한 곳에서는 임종을 기다리는 노인의 신음이, 또 다른 방에서는 결혼식을 치르는 등 삶의 이야기가 모두 공개되는 이곳에서는 철저한 공동생활로 살았다. 부와 가난이 구별되지 않는다. 바위를 파서 만든 2~3명만이 쓸 수 있는 공간이면 만족할 뿐 그것도 개인소유는 아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어두컴컴한 지하 동굴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 확실한 약속을 믿기에 오늘의 고난을 잠시잠깐 동안 받는 유익으로 믿었던 초대 기독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저력을 확인하며 그 고난의 현장을 우리는 엄숙한 걸음으로 걸었다.
개미굴 같은 지하도시 탐험을 마치고 출구로 빠져나오면서 밝은 햇빛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힘겹게 지켜낸 신앙, 그런데 무엇이 그 신앙의 굳건한 터를 흔들었을까. 우리 일행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소아시아 7교회의 무너진 터를 기억하며 발길을 옮겼다. 오늘의 기독교, 오늘 나의 신앙을 되짚으며 그 심판의 칼날은 그 때 끝난 것이 아닌 오늘에도 진행중인 것을 직시하면서….

출처 : 忍松齋
글쓴이 : 제임스본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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