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 고대신문(1961)에 처음 게재, 김종길 시집 <성탄제>(삼애사, 1969)
이 시는 김종길(1926~2017) 시인의 시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설날 아침에 새해를 축하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며 덕담으로 딱 어울리는 시입니다. 해마다 설날 아침이면 제가 슬쩍 꺼내서 읽는 시이기도 합니다.
혹한의 겨울 추위 속에서도 만물의 생리를 묵상하고, 새봄을 기다리는 겸허한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차갑고 두꺼운 얼음장 밑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고기이며, 꽁꽁 언 미나리꽝에서도 새롭게 싹이 나는 순환의 자연 원리를 시인은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 한 해가 가고 / 또 올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믿음으로,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자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어린것들 잇몸에서 새 이빨이 돋는 것처럼, 늙은이들은 사라져 가더라도 한 세대가 가면 또 다른 한 세대가 오는 삶의 순환은 어김없이 그렇게 이어져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설날 아침에 읽을 그의 또 다른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50년이 지나서 그의 나이 팔순이 훨씬 넘은 후에 새해를 맞으며 그가 설날 아침에 다시 들려주는 덕담이자 연하장의 인사 같은 이 시가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썼던 처음 읽었던 시와 여전히 똑같은 그낌이 드는 것이 참으로 희한할 뿐입니다.
우리네 새해 아침은
- 김종길
우리네 새해 아침은
눈도 매화 송이로 이마에 와 닿고,
추위도 맑은 향기로 옷깃에 스며든다.
우리네 새해 아침은
푸른 솔가지 위에 학 한 마리 앉혀놓고,
붉은 해가 치솟는 달력 그림만큼이나 의젓하다.
객지에 나가 살던 사람들 돌아오고,
돌아간 조상들도 제상 머리에 나앉는,
향불 피는 냄새로 한 해가 시작되는 아침.
무슨 근심, 무슨 슬픔, 무슨 미움, 무슨 사특함,
언짢은 건, 누추한 건, 모조리 불살르고,
선의와 평화로 가득한 환한 얼굴을 들자.
어린이, 젊은이는 마냥 신나고,
어른은 희망에 부풀어 새로 힘이 솟고,
늙은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기만 하면 되는 것.
괴롭고 가난했던 옛날은
이젠 차라리 한갓 그리운 추억 -
새해 아침은 앞날을 내다보며 오붓한 꿈을 설계하라.
묵고 때 묻은 것은
묵은 해와 함께 보내고,
새해는 새롭고 깨끗한 것만을 있게 하라.
- 시집, <해거름 이삭줍기>(현대문학, 2008)
섣달그믐이었던 지난밤에는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넷플릭스 영화를 한 편 감상했습니다. 제목은 <디센던트>. 아름다운 하와이의 풍광을 배경으로, 자칫 완전히 망가질 뻔한 한 가족이 서로 화해해 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낸 수작(秀作)의 가족 영화였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있는 아내, 그동안 일에만 파묻혀 있으면서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남편, 그리고 그의 두 딸이 조금씩 좁혀질 것 같지 않았던 간극을 좁혀 가는 과정을 그려냈는데,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었지만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의 소중함’이었습니다. 일상에 매몰되어 정신없이 살아가기보다는 가끔 우리는 멈춰 서서 내 곁에 있는 가족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또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갑진년(甲辰年) 한 해는 '무슨 근심, 무슨 슬픔, 무슨 미움, 무슨 사특함, / 언짢은 건, 누추한 건, 모조리 불살르고, / 선의와 평화로 가득한 환한 얼굴을 들'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또 뜻밖의 행운보다는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 고운 이빨을 보듯' 평범한 일상(日常)에서 오는 소소한 행복들이 물 흐르듯 넘치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 갑진년(甲辰年) 설날 아침, 은평 뉴타운 폭포동에서 석전(碩田)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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