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신문 2 / 그 시인 - 이영광

석전碩田,제임스 2023. 1. 4. 06:39

신문2

- 이영광

잡지 편집자는 고운 목소리로 잘도 날
신문(訊問)해서, 청탁을 성사시켜버린다
너무 쉽게 자백해 큰일 난 나는
몇 문장만 얻어 보려고 나를 신문한다
내가 신문하는 시늉만 하니까
나는 나에게 벙어리 시늉만 한다
신문하던 나는 지쳐 신문받던 나를
집에 두고 여기저기 걷는다 허기를
잊고 교외로 나가다 보면 어느새 저만치
신문받던 내가 뒤따라오고 있다
우물쭈물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부르면 등 돌리고 아무 말이 없다
돌아오는 길은 축축이 봄비가 내려
우산을 받고 걷는다 걷다가 또 돌아보면,
신문받던 내가 여전 뒤처져 오고 있다
무슨 말을 우물거린 듯한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고 전봇대 아래 서 있다
우산을 씌워주려고 다가가면 다 젖어
비칠비칠 물러난다 기운이 없어 화내거나
멱살을 쥐지도 못하는 건 나지만, 그 또한
어깨가 구부정하고 다리는 절룩거려
내 쫓아간 만큼 허위허위 물러나고
돌아온 만큼 또 따라붙으니 고운 목소리,
고운 목소리라도 있었으면 싶어진다
신문받는 그가 신문하던 나이고
신문하는 내가 신문받던 그였음을
알면서 알지 못한다 이렇게라도 몰라야
어두우면, 어디 갈 데도 없어 좁은 방에
함께 들 테다 지친 미안과 엄한 다독임으로
신문은 우릴 먼 어둠으로 데려갈 터이다

- 시집 <해를 오래 바라보았다>(주)아시아, 2019)

* 감상 : 이영광 시인. 1965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에서 태어나 안동에서 성장했습니다. 지난주에 소개했던 김용락 시인도 의성군 단촌면 출신이면서 안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또 첩첩 산골 출신 시인이라는 점에서 두 시인이 묘하게 닮은 점이 있습니다. 원래 출생일보다 2년이나 늦게 출생 신고를 하는 바람에 그의 첫 시집에는 1967년생으로 표기되어 있었으나 두 번째 시집부턴 실제 생일로 고쳤다고 합니다.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이 ‘미당 서정주 시에 대한 무속적 연구’였습니다.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빙폭’ 외 9편의 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2008년 노작문학상, 2011년 지훈상(문학 부문), 미당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집으로 <직선 위에 떨다>(창비, 2003),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아픈 천국>(창비, 2010), <그늘과 사귀다(재판)>(문예중앙, 2011), <나무는 간다>(창비, 2013),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8), <해를 오래 바라보았다>(주)아시아, 2019) 등이 있습니다. 산문집으로 중앙일보에 ‘시가 있는 아침’ 코너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홀림 떨림 울림>(나남, 2013)이 있습니다. 2015년부터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인문대학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시집에 나란히 두 편이 실려 있는 같은 제목의 시 중에서 두 번째 시입니다. 이 두 시의 공통점은 내면에 있는 ‘자신’과 외부적으로 규정되는 ‘자신’을 분리시켜 두 개의 ‘자아’가 서로 서로 심각한 내적 질문을 하면서 추궁하는 과정으로 재미나게 풀어낸 시입니다. 시어 한 문장을 건져올리기 위해서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을 수사 과정에서 취조하는 용어인 ‘신문(訊問)’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심각한 부담감과 긴장감을 더해주는 재미난 시입니다.

시를 읽다가 갑자기 시는 존재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했던 정현종 시인의 ‘시, 부질없는 시’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시를 가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도대체 시의 존재 가치는 무엇인가를 깊이 고뇌하다가 결국 시는 마치 겨울 눈과 같다고 비유했던 시입니다. 깊은 밤에 내린 눈이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아무 발자국도 없지만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 저 혼자 아름답다.’고 노래한 멋진 시입니다.

시(詩), 부질없는 시(詩)

- 정현종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 시선집 <고통의 축제>(민음사, 1974)

무 효용가치도 없는 이런 시 한 편을 쓰기 위해서 시인들이 고뇌하는 처절한 모습을 ‘스스로 취조하고, 취조당하는’ 신문의 과정에 비유하여 그려내고 있는데 그 절박함이 참으로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잡지사에 기고할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신문받는 나’와 ‘신문하는 내’가 서로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듯 모른 채, 캄캄한 어둠에 들어야만 겨우 ‘몇 문장’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몸부림처럼 느껴집니다.

가 좋아 시를 전공했고, 박사 학위 논문도 시를 주제로 썼으며, 또 먹고 살기 위해서 ‘교수’라는 안정된 직함을 얻어 ‘대학’이라는 조직에 몸 담았지만 자유로와 진게 아니라 오히려 갇힌 느낌이 듭니다. 배고프게 시만 사랑하던 시절보다 오히려 시 ‘몇 문장만 얻’는 것도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런 시인의 현실적인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시 한 편을 더 읽어 보겠습니다. ‘그 시인’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그 시인

- 이영광

누가 써 보내라 하지 않아도
강제로 쓴다
한 해에 두세 군데 청탁이 오기 전에
겁을 집어먹고 벌써
쓰고 있다

무엇이 강제하는지 모르고
집에서 밥집에서 길에서
멍청하게 멈춰 강제로,
억지로 쓴다
강제로 쓴다

밥은 안 되지만 밥벌이하듯 쓴다
돈은 안 되지만 돈의 노예처럼 쓴다
이름은 없지만 정말
무명이 되어 쓴다
무명으로 쓴다

주인 없는 새 세상에 절망에 통곡하던
해방 노비들처럼
누가 뛰어 들어와 선 줄도 모르고
정성스레 혼자 노래하는 아이처럼

사랑으로 쓴다
사랑의 강제로 쓴다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쓴다

그게 사랑인 줄도 모르고
그게 사랑인 줄도 모르고

- 시집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8년)

인은 시집의 마지막에 실은 발문에서 ‘어디를 둘러봐도 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 할 말이 있는 사람이 / 시를 쓴다// 시인은 더 잘 더듬으려고 애쓰는, 이상한 말더듬이다.’라고 겸손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시를 공부하기 위해 찾아 온 학생들에게 말해 줄 게 아무것도 없는 무력감마저 느끼면서 스스로를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2023년 새 해를 맞으면서, 첫 감상 시로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말더듬이’,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하는 시인의 시를 선택한 건, 초심으로 돌아가는 다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실용적이고 효용가치만을 따지는 캄캄한 세상 가운데서 그저 ‘먹고 사는 고민’이 아니라,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더 근원적인 것’에 집중하는 거룩한 결심 말입니다.

‘밥은 안 되지만 밥벌이하듯 쓴다 / 돈은 안 되지만 돈의 노예처럼 쓴다 / 이름은 없지만 정말 / 무명이 되어 쓴다 / 무명으로 쓴다 // 주인 없는 새 세상에 절망에 통곡하던 / 해방 노비들처럼 사랑으로 쓴다’

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처절하게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절절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