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끓이다
- 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체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기가 사라진다
-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감상 : 장현숙 시인.
1964년 경기도 김포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해마다 1월 1일이면 집 가까운 신문 가판대에 가서 모든 일간신문을 몽땅 구입해서 그 신문들에 실려 있는 그해 신춘문예 당선작품들을 따끈따끈하게 읽는 재미를 만끽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올해는 어떤 시가, 또 어떤 소설이 당선되었을까 또 당선된 사람들이 소감으로 어떻게 말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또 신문에 게재된 작품을 심사위원들이 한마디 평한 심사평을 양념 삼아 직접 읽는 것이 참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 거의 모든 신문을 실시간으로 읽을 수 있어 일부러 종이 신문을 사기 위해 가까운 지하철역 판매대를 찾아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여하튼 당시에는 그게 뭐라고 매년 1월 1일이면 열심히 그 신문을 구하려고 그리도 애썼는지 모르겠습니다.
2023년 1월 1일, 각 일간신문에는 올해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어김없이 발표되었습니다. 일간신문뿐 아니라 주간 신문사, 인터넷 신문사 등 수 많은 매체들이 신년 첫 신문에 그 해 신춘문예 당선작을 발표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유지되어 온 일종의 변하지 않는 ‘관례’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오늘 감상하는 작품은 멀리 제주도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인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당선작으로 선정된 작품입니다.
책을 음식의 맛에 비유해서 절묘하게 그 사례들을 일상의 삶 속에서 찾아내서 재미나게 엮어낸 시입니다. 책과 맛의 상관 관계, 그리고 책 읽는 행위와 음식을 만드는 일을 비유적으로 대비시켜 ‘시적 은유’로 풀어나가겠다고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 첫 문장에서부터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라고 분명히 밝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이 시를 당선작으로 뽑으면서 이렇게 간단하게 평을 했습니다.
“현실 속의 사물인 '책'과 그에 수반하는 작가의 상상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시어 운용의 능숙한 솜씨가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능력을 배가하고 있는 점이 크게 돋보였다. 시적 화자의 스탠스가 분명하여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장점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에 합의했다.”
우리의 일상에서 늘 접하는 책이라는 실물, 그리고 그 책을 읽는 평범한 행위를 작가의 상상력(비유)을 동원하여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표현한 점이 돋보였다는 말입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는 장면이라든지, ‘새벽까지 읽던 책’ 등의 평범한 시어를 주방에서 음식을 하는 장면과 연결시킨 상상력이 재미있습니다.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가는 모습은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성취감처럼 밥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압력 밥솥의 추 소리로 연결했고, 중간에 끊지 못해 새벽 늦은 시간까지 읽었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나는 음식으로 비유했습니다. 또 읽다가 잠시 쉬기 위해서 접어 둔 흔적을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 한다는 것’으로 표현한다든지, 일기장이 가장 뜨거운데 그 이유가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라는 상상력도 참신하고 기발합니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체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술 떠 삼키면 / 마음의 시장기가 사라진다’는 시의 마지막 연은, 그저 평범했던 시적 은유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시를 마무리하면서 어쭙잖게 독서의 중요성을 조언한다든지 또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든지 하는 시시콜콜하게 교훈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툭 한마디 던지듯이 ‘그 한술 떠 삼키면 / 마음의 시장기가 사라진다’는 시적 은유가 긴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를 도전하여 드디어 시인의 등용문을 통과한 당선자가 당선 소식을 듣고 그 기쁜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쓴 소감문을 읽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소감문을 읽으면서 이 글을 맺으려고 합니다. 따끈따끈한 시 못지않게 당선 소감문을 읽는 재미가 어쩌면 더 쏠쏠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당선되었다는 첫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전율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뜨겁게 졸아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맛으로 남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성장해 가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
[당선 소감]
"힘들 때 찾아온 아버지의 선물"
치과 진료 중이었습니다. 손에 꼭 쥔 전화기 진동이 울려 잠깐만요 전화 좀 받아볼게요 하고 접한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윙윙거리는 기계음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귀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열흘 전 곁을 떠나신 아버지 얼굴이 어른거렸습니다. 병간호 잘해줘서 고맙다고 등을 토닥여주시며 무슨 일이든 잘 될 거라던 아버지가 선물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장과 그 흐름은 그 사람의 성격과 같다고 하는데, 나는 종종 한 박자 느리고 생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꼭 맞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책들의 제목을 읽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제목들만큼 알맞은 문장이 있을까요. 또 책들은 그 맛이 제각각입니다. 짠맛 신맛은 물론 마음에 꼭 맞는 맛들도 있습니다. 새벽까지 읽던 책이 뜨겁게 졸아서 내 가슴속 지워지지 않는 맛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한라일보와 심사위원 김병택, 양영길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문장의 흐름과 이미지를 선연하게 가르쳐주신 윤성택 시인님 감사합니다. 시클, 김산, 이종섶, 이수정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교수님들과 어려운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경애하는 엄마, 동생 현남, 옥희 그리고 늘 곁에서 응원해 주는 남편 김병기, 민서, 민규, 주오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합니다. - 장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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