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먹습니다
- 윤이산
또록또록 야무지게도 영근 것을 삶아놓으니
해토解土처럼 팍신해, 촉감으로 먹습니다
서로 관련 있는 것끼리 선으로 연결하듯
내 몸과 맞대어 보고 비교 분석하며 먹습니다
감자는 배꼽이 여럿이구나, 관찰하며 먹습니다
그 배꼽이 눈이기도 하구나, 신기해하며 먹습니다
호미에 쪼일 때마다 눈이 더 많아야겠다고
땅 속에서 캄캄하게 울었을,
길을 찾느라 여럿으로 발달한 눈들을 짚어가며 먹습니다
용불용설도 감자가 낳은 학설일 거라, 억측하며 먹습니다
나 혼자의 생각이니 다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옹심이 속에 깡다구가 들었다는 건
반죽해 본 손들은 다 알겠지요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₁₎는 그 일념만으로
안데스 산맥에서 이 식탁까지 달려왔을 감자의
줄기를 당기고 당기고 끝까지 당겨보면
열세 남매의 골병든 바우 엄마, 내 탯줄을 만날 것도 같아
보라 감자꽃이 슬퍼 보인 건 그 때문이었구나,
쓸쓸에 간 맞추느라 타박타박 떨어지는
눈물을 먹습니다
☛
₁₎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 : 감자꽃의 꽃말
- 계간 <다층> (2010년 가을호)
- 시집, <물소리를 쬐다>(실천문학상, 2020)
* 감상 : 윤이산 시인.
1961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주 문예대학,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9년 인터넷 뉴스제주<영주일보>가 주최하는 신춘문예 시 부문에 ‘선물’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 in> <응시> 동인으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20년 첫 시집으로 <물소리를 쬐다>(실천문학사, 2020)를 상재하였습니다.
지난 6월 하지가 며칠 지난 어느 날, 행주산성 바로 옆에 조카가 도시 농부로서 재미삼아 짓고 있는 밭에서 [가족 감자 캐기] 행사를 하였습니다. 500평 남짓한 밭에 감자, 고구마, 고추 등 여러 가지 작물을 심다 보니 감자 이랑은 그리 많지 않아 장정 가족들이 한 이랑씩 맡아 금방 작업은 마무리 되었지만, 매년 감자 캐는 날은 온 가족이 모여 ‘공동의 작업’을 하는 홈커밍데이 같은 날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매년 그 자리를 지켜주셨던 형님께서 돌아가신 지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함과 쓸쓸함이 있었지만, 감자를 캐는 게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가족의 사랑과 정을 앞으로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도 시인이 ‘삶은 감자’를 먹으면서 마치 서로 관련 있는 것끼리 선으로 연결하는 게임을 하듯, 줄줄이 연상의 세계로 빠져들다가 종국에는 시인을 포함한 여러 자식을 낳아 키우느라 골병이 든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랑과 정’까지 이르는 상상력을 만나게 됩니다.
시인은 감자를 먹으면서 감자를 자신의 몸과 비교 내지는 동일시하는 연결 작업을 시도합니다. ‘감자는 배꼽이 여럿이구나, 관찰하며 먹습니다/ 그 배꼽이 눈이기도 하구나, 신기해하며 먹습니다/ 호미에 쪼일 때마다 눈이 더 많아야겠다고/ 땅 속에서 캄캄하게 울었을,/ 길을 찾느라 여럿으로 발달한 눈들을 짚어가며 먹습니다’ 그저 모양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땅 속에 있을 때 울었을, 길을 찾느라 헤매던 자신의 과거와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미에 쪼일 때마다 내 눈이 아니라 나를 쪼은 그 호미에 눈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슬픈 노래도 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상상 줄잇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벼, 밀, 옥수수와 더불어 세계 4대 식량 작물로 인정 받고 있는 감자이지만 원래는 전혀 사람들의 관심 밖의 존재였다는 역사적인 근원까지 시인은 들춰냅니다. 안데스 산맥 주변의 고원지대가 원산지인 감자가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었지만 18세기 초까지 ‘악마의 열매’로 치부되어 그저 관상용으로만 키워졌다고 합니다. 못 생기고 허접하게 생긴 뿌리가 성경에도 언급된 바 없으니 유럽인들은 노예나 하층민들이 먹는 비천한 음식이라고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 감자가 라마르크가 주장했던 진화 이론인 ‘용불용’으로 스스로 진화하여 유럽인의 식탁에서 주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은 서민의 주식을 넘어 우주식량, 의약 산업의 신소재, 종자 산업 등에서 다양하게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시인은 짧은 한 마디의 유머스런 표현으로 정리해 버립니다. ‘용불용설도 감자가 낳은 학설일 거라, 억측하며 먹습니다/ 나 혼자의 생각이니 다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라고.
감자를 갈아 만든 수제비를 ‘옹심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도 꽤 있는 듯합니다. 가끔 ‘감자옹심이 수제비’를 하는 식당 간판이 내 걸리는 걸 보면 어김없이 강원도 감자로 만든 옹심이 수제비를 주 메뉴로 내 놓곤 합니다. 시인의 연결 고리는 감자옹심이 속에 들어 있는 ‘깡다구’의 아련한 추억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열세 남매를 키워 낸 옹심이 반죽을 직접 만들어 보지 않았으면 그 속에 있는 ‘깡다구의 존재’는 물론, 또 감자 꽃이 왜 슬픈 보랏빛인지 미처 모를 것이라고 시인은 단정합니다. 사실, 시인도 그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으니까 말입니다. 삶은 감자 하나를 먹으면서 시인이 달려온 숨 가쁜 선 잇기 게임은, ‘오직 당신만 따르겠습니다’는 일념으로 그 힘든 삶의 여정을 달려온 ‘바우 엄마’가 흘렸던, 타박타박 떨어지는 눈물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상상력이 참으로 대단하지요?
시인이 등단할 때 당선작으로 뽑혔던 시, ‘선물’을 읽으면 이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존재가 오늘 감상하는 시에서도 그대로 연결된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입니다. 찐한 경상도 사투리에서 묻어나는 가족 공동체의 정을 느낄 수 있는 토속적인 시를 덤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해마다 감자 캐는 날이 다가오면 타박타박한 분이 나는 감자와 함께 선물처럼 찾아 올 먼저 가신 이의 향기도 그리워질 것입니다. - 석전(碩田)
선물
- 윤이상
늙은 두레상에 일곱 개 밥그릇이
선물처럼 둘러있습니다
밥상도 없는 세간에
기꺼이 엎드려 밥상이 되셨던 어머닌
맨 나중 도착한 막내의 빈 그릇에
뜨거운 미역국을 자꾸자꾸 퍼 담습니다
어무이, 바빠가 선물도 못 사 왔심니더
뭐라카노? 인자 내, 귀도 어둡다이
니는 밥심이 딸린동 운동회 때마다 꼴찌디라
쟁여 두었던 묵은 것들을 후벼내시는 어머니
홀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바람이 귓속을 막았는지
추억으로 가는 통로도 좁다래지셨습니다
몇 년 만에 둥근 상에 모여 앉은 남매는
뒤늦게 당도한 안부처럼 서로가 민망해도
어머니 앞에선 따로국밥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엔 밥통이 없어가 아랫목 이불 밑에 묻었지예
어데, 묻어둘 새나 있었나 밥 묵드키 굶겼으이
칠 남매가 과수댁 귀지 같은 이야기를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쓸어 모으다가
가난을 밥풀처럼 떼먹었던,
양배추처럼 서로 꽉 껴안았던 옛날을 베고
한잠이 푹 들었습니다
문밖에는 흰 눈이 밤새
여덟 켤레 신발을 고봉으로 수북 덮어 놓았네요
하얗게 쏟아진 선물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는 어머니
아따, 느그 아부지 댕겨가신 갑따
푸짐한 거 보이, 올핸 야들 안 굶어도 되것구마이
미역국처럼 뜨끈한 목소리를 싣고
일곱 남매가 또 먼 길을 떠나는 새벽
- 2009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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