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니까, 시월이니까
- 박제영
이 밤이 지나면 해는 짧아지고 어둠은 깊어지겠지
기차는 떠나고 청춘의 간이역도 문을 닫겠지
춘천이 아니면 언제 사랑할 수 있을까
시월이 아니면 언제 이별할 수 있을까
지상의 모든 악기들을 불러내는 거야
사람도 짐승도 벌레도 다 불러내는 거야
이곳은 춘천, 원시의 호숫가
발가벗은 가수가 노래하고, 가수가 아니어도 노래하지
지금은 시월의 마지막 밤, 야생의 시간
발가벗은 무희가 춤을 추고, 무희가 아니어도 춤을 추지
불을 피우고 피를 덥혀야 해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헤어져야 해
아침이 오면 안개가 몰려 올 테니
마침내 시월을 덮고 춘천을 덮을 것이니
사랑해야 해 우리, 춘천이니까
이별해야 해 우리, 시월이니까
<소통의 월요 시편지 489호 (2016)>
* 감상 : 어제, 시월의 마지막 밤은 잘 보내셨는지요? 춘천 출신 박제영 시인의 이 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려면 아마도 50은 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예전, 경춘선 열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을 70,80년대 때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면서 춘천을 추억의 장소로 기억하고 있는 나이라야 이 시의 표현들이 공감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가을 춘천을 생각하면 강촌역에서 내려 등선 폭포가 있는 계곡 즈음에서 찐한 데이트를 즐겼던 기억이 아련하고, 또 군 복무 시절 말년 병장일 때 팀스피리트 훈련에 통역병으로 참가하여 의암호 인근 어느 군 휴게소에서, 미군을 만날 기회가 없으니 연일 무료하게 대기하던 시절 샛노란 은행 잎을 주어모아 그 위에 연애편지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상대가 지금의 아내여서 춘천과 연관된 이별 추억은 없지만 춘천은 여전히 우리 연배 이상의 세대에게는 사랑과 이별의 추억 만들기 장소임에 틀림없는 듯 합니다.
40년 전, 영미소설 강독 시간에 이용의 10월의 마지막 밤, <잊혀진 계절> 노래를 부르는 학생에게는 A 학점을 주겠다고 해서, 친구 중 하나가 강의실에서 그 노래를 목청껏 불렀던 모습도 아련합니다. 아마도 그날 그 특별한 주문을 했던 여교수님도 그 날은 40대 후반을 살아가시면서 이 가을의 벅찬 쓸쓸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가을 날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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