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1분 묵상

부활신앙, 부활, 영생에 대한 이해

석전碩田,제임스 2018. 8. 22. 15:43

부활신앙, 부활, 영생에 대한 이해

 

- 길희성 교수(강화 명상의 집, <심도학사> 원장)

 

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35절 ~ 54절

 

오늘 부활신앙에 대해 드릴 메시지를 준비하던 중 이 문제를 두고 고심했던 나의 젊은 시절 신학공부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당시 부활에 대해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첫째, 기독교라는 종교는 부활신앙이 없다면 무너질 뿐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우선, 복음서라는 것이 역사의 예수에 대한 전기 같은 사실적 기록이 아니라, 부활신앙으로 재해석되고 채색된 예수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기록이라는 점이다. 복음서들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신앙을 반영하는 기독 공동체의 이야기들이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었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복음서들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째, 따라서 부활신앙에 대한 가장 확실한 간접적 증거는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2,000년 동안 존재해왔다는 사실이다. 부활신앙이 없었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에 기초한 교회 공동체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하느님나라 운동을 벌이다가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베드로를 비롯한 비겁한 제자들은 모두 내버려 두고 갈릴리로 도망치거나 뿔뿔이 흩어져버렸지만, 예수가 부활하여 여기저기 제자들과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는 현현 이야기들이 돌기시작하면서 그를 따르고 추모하던 사람들이 다시 용기를 내서 당시 권력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으로 모인 것,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가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그의 아들이고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게 된 놀라운 반전은 부활신앙 없이는 결코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임이 확실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또 십자가에서 처형당해 하느님에 의해 버림받았다고 여겨지는 예수가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터무니없이 들리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전파하는 교회를 박해하던 경건한 유태인 바울에게 일어난 드라마틱한 회심 사건 역시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확신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학생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나 자신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는 부활이라는 모종의 <사건> 없이 과연 부활 <신앙>이라는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부활신앙이 없었다면 기독교라는 종교, 교회라는 공동체가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이 없지만, 부활사건 없이 어떻게 부활신앙이 생겨났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무척이나 궁금하고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게 되었다. 나는 물론 예수의 부활 이야기들이 죽은 예수를 무척 그리워하던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들일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또 부활하신 예수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기저기 나타나셨다는 현현사화나 빈 무덤의 이야기 같은 것은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든지, 아니면 스승을 너무나도 그리워한 나머지 제자들이 본 환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얄팍하고 허약한 이론에 나의 신앙을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부활이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든가 그들이 본 환상이라면,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는 하나의 위대한 거짓말에 기초한 희대의 사기극이 되고 말 것이다. 차라리 부활을 부정하면 했지, 나는 그런 식의 심리적 해석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 사건을 이런 식으로 제자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어떤 심리적 사건, 마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모든 종류의 이론을 단호히 거부한다. 차라리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솔직히 이야기편이 더 낫다. 기독교와 아예 연을 끊으면 끊었지 그런 얄팍한 이론에 우리들의 신앙과 삶을 걸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와 유사한 이론들이 신학자들 가운데서 돌아다니고 있지만, 이는 정직하지 못한 태도이며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금하기 어렵다. ‘모종의 부활 사건을 말하지 않고 단지 부활신앙만을 논하는 신학자 불트만(R. Bultmann) 유의 신학은 결국 문제를 회피하는 태도이며, 그리스도교 진리를 우리의 주관적 신앙이 만들어 낸 결과로 보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욕망과 희망의 투사(projection)로 보는 각종 무신론자들의 비판에 쉽게 길을 터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런 정직하지 못하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이론에 사람들이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맡기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부활 사건도 믿기 어렵지만, 그런 허약한 이론 위에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고전 15:14). 그는 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인간들일 것이라고도 말한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드라마틱한 회심 이후 그의 삶과 인생관과 가치관이 180도 바뀌게 되었고, 온갖 위험과 위협을 무릅쓰고 지중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한 위대한 전도자 되었고, 실제상 기독교의 창시자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된 사람이다.

 

엄격히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바울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그의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에 부활의 객관적 사실성을 입증할 수는 없지만, 그는 예수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고난을 자취하는 어려운 삶을 살았겠는가 반문한다. 더욱이 그는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통해 부활에 대해 매우 강력하게 논증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복음서들보다도 훨씬 더 먼저 쓰인 부활에 관한 글이고, 부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다. 나는 오늘 이 말씀에 기초해서 부활에 대해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부활신앙전에 모종의 부활사건이 있었을 것이라고 해서, 나는 부활사건이 우리가 아는 여느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객관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부활사건이 부활신앙을 입증해준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부활 차제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한 사람 또는 몇몇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주장해도 그것이 부활이 객관적인 사실임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마치 몇몇이 UFO를 목격했다고 주장한다고 그것이 실재한다는 실증이 되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나는 모종의 예수의 부활사건이 없었으면 예수에 대한 부활신앙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부활 사건이 과연 어떤 종류의 사건이며 어떤 성격의 사건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부활사건을 단지 마음속에 일어난 심적 변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지만, 부활사건이 과연 어떤 성격의 사건이었는가를 논하는 데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활은 기독 신앙에서 사후심판과 영생에 대한 믿음과 같이 간다. 부활이 없다면,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인생이 정말로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더욱이 자발적으로 매주일 부담스러운 설교를 들으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 같다.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큰 교회에 다니면서 편하게 신앙생활 하면 될 것 아닌가, 아니면 그냥 휴머니스트로 잘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 데 영생에 대한 확신도 없는데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언처럼, 사람은 죽으면 어차피 자연의 한 조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래서 마더 테레사처럼 산 사람이나 히틀러처럼 산 사람이나 죽으면 다 마찬가지 운명에 처한다면, 인생에 정말 도덕적 질서와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든다. 호르크하이머(Horkheimer)라는 유태계 철학자는 본래 무신론자였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영원히 승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차마 그 꼴은 못 보겠다는 생각에 신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이 말은 본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라는 문학 평론가가 한 말이지만,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다. 우리가 정말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영원히 승리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정의를 부르짖고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한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어차피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데.’

 

반면에 우리가 부활과 사후심판과 영생을 정말 믿는다면, 현세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영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현세는 일순간에 지나지 않으니까 우리가 현세에서 가지고 사는 모든 욕망과 꿈이 그야말로 헛된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로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죽음 이후를 기다리는 것이 하늘나라의 영생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현세는 영생의 빛에 조명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죽음은 영생으로 이어지는 관문이기 때문에,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긴 호흡으로 인생을 더 여유롭고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영생을 두고서 자기 삶에서 한판의 진검승부를 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진정으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간과 영원을 두고 한판 승부를 해 보지 않고는, 신앙의 결단과 인생의 결단을 한 번도 제대로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신앙의 진정한 의미,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물질문명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진 현대세계에서는 오히려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되었다. 모두가 교육수준이 높아져서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성직자나 수도승처럼 살 수 있고 누구나 다 신앙과 영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탈 물질주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기복신앙을 찾을 필요가 없고 종교도 더 이상 기복신앙을 팔지 말고 본연의 진정한 메시지를 가지고 세상과 승부를 해야만 한다. 비록 소수일이라도 정말로 영적으로 사는 신자들, 참으로 행복한 신자들을 만들어 내는 종교만이 앞으로 살아남을 것 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종교,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할만한 가치를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종교만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 종교만 살아남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사람이 죽은 후에 또 다른 삶이 전개된다는 생각은 불교, 힌두교, 등에서 말하는 업보와 <윤회사상>, 아니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등에서 믿는 <부활신앙> 뿐이다. 그러나 이 두 선택 모두 현대세계에서 설득력을 상실해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와 힌두교는 업보윤회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기복신앙이 없어도 생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서양의 백인불자들에게서 잘 보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는 사정이 다르다. 내세와 영생에 대한 확신, 부활에 대한 확신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바울 당시에도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냐고 의심하는 자들이 많았다. 유대교 내에도 바리사이파들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부활을 믿었지만, 부유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사실 구약성서에는 본래 부활 사상이나 신앙이 없었고, 구약 말기에 와서야 민중 속에 퍼지기 시작했고, 그 후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의 신앙이 되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강력한 논박이다. 부활신앙에 대한 복음서보다도 훨씬 오래된 문헌이고 증언이다.

 

우선 부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불식할 필요가 있다.

 

첫째, 부활은 일시적 소생(rescucitation)이 아니라는 점이다. 죽어서 썩어 문드러졌던 몸이 갑자기 다시 살아나는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완전한 오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간단한 사실을 무시하고 부활을 마치 우리가 잠을 자다가 갑자기 깨어나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부활은 일시적 육체의 소생과는 달리, 다시는 죽음이 없는 세계로 옮겨진다는 것을 뜻한다. 시간과 역사의 세계를 벗어나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 영생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그러기 위해서 부활은 우리가 물리적 육체(soma physikon)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는 몸은 영적 몸(soma pneumatikon, 영의 몸)으로 변화된 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지상에서 시간의 세계를 살다가 죽고 무덤에서 부패하는 몸이 아니라, 다시는 죽음을 모르는 몸, 부패하지 않는 몸, 하느님의 영의 힘으로 변화된 영의 몸, 혹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건져낸 부활의 영으로 변화된 영광스러운 몸(glorified body)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흙으로 된 지상의 몸이 하늘의 영광스러운 몸, 그리스도를 닮은 영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부활의 몸은 천사와 같이 빛나는 몸 예수님께서 하신 부활에 대한 몇 안 되는 말씀 하늘의 영광스러운 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또 부활의 몸은 최초 인간 아담의 물리적인 몸(soma physikon)과 달리 종말의 몸으로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 ‘부활의 영으로 변화된 영의 몸이라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흙에서 온 몸이듯이 우리도 흙의 형상을 지니고 살지만, 부활의 몸은 그리스도와 같이 그의 형상을 지닌 하늘로부터 온 몸을 갖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썩을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산으로 받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셋째, 부활은 따라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지 인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불멸하는 요소나 속성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활은 현세를 살고 죽은 우리의 육체의 부활이 아님은 물론이고, 몸은 죽지만 영혼은 불멸한다는 플라톤주의(Platonism) 철학이 말하는 영혼불멸설의 사상과도 무관하다. 영혼불멸 사상이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들어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신자들 가운데는 우리가 죽으면 불멸의 영혼이 육체의 제약에서 해방되어서 하느님께 직행해서 영생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는 몸이 없는 인간을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우리가 죽으면 몸은 무덤에 있다가 세상 종말이 오면 모두가 부활하여 영혼과 재결합한다는 식의 절충안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더욱 아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 부활은 어디까지나 영이신 하느님의 능력이지 인간 자신이 지닌 어떤 불멸의 속성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성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God raised him up)는 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이다(2:24). 부활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도 부활의 몸, 영의 몸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다. “하느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다소 조잡한 표현은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이와 같은 진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넷째, 부활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생긴 신앙이라는 점이다. 이 불의한 세계와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하느님이 친히 다스리는 세계를 기다리는 종말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 희망과 신앙이 널리 퍼진 구약시대 말기의 시대적 환경을 배경으로 하여 생긴 종말론적 사건(eschatological event)이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최후심판 사상은 본래 구약성서에는 없었던 것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적 역사가 계속되는 가운데 외부세계로부터 유대교에 유입된 사상이었다. 하느님께서 억울하게 죽은 자, 의로운 자들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의 종말과 더불어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고 심판하실 거라는 생각이 널리 펴지게 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종말론적 기대가 실제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불의한 지상의 역사가 완전히 끝나고 하느님 자신이 직접 통치하시는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민중의 간절한 바람과 기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으로 여겨진 것이다.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복권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온다는 대중적 기대와 열망이 실현되기 시작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다섯째, 예수 자신도 그러한 종말신앙과 사상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기도하셨다. 예수는 물론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임하옵시고,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종말의 세계가 이 세상, 즉 현세에서 실현되기를 바랐고 거기에 온몸을 바쳤지만, 그는 동시에 하늘나라가 우리의 노력이나 성과에 상관없이 하늘 아버지의 세계에서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는 영원한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영역임을 믿었다. 역사와 시간의 세계 저편에 있는 영원한 세계이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사셨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현세에서 벌이는 하느님나라 운동도 중시하지만, 하느님 나라(Kingdom of God) 혹은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 즉 천국이 우리의 노력이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시간의 세계를 초월하여 이미 존재하는 하느님의 세계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벌이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 자칫하면 각종 세상의 단체들이 벌이는 시민운동처럼 되어버리기 쉽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을 시간의 세계 내에서 발생하는 여느 사건들처럼 간주해서는 안 된다. 부활은 역사의 종말을 알리는, 시간의 세계를 초월하는, 말하자면 사건 아닌 사건과도 같기 때문이다. 부활은 우리를 하늘의 영생으로 인도하는, 지상의 시간과 하늘의 영원이 접하는, 매우 특이한(singular)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하느님의 세계 창조에 비교할 수 있다. 둘 다 하느님의 영원과 지상의 시간이 맞 닫는 경계선 상의 일이다. 성서는 따라서 부활과 함께 이전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창조’(new creation)가 열린다고 말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실현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창조가 단순히 하나의 시간적 사건(temporal event)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물질과 정신 모든 것이 비롯되는 특이점’(singularity)이듯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대로 창조는 시간 속에서’(in time)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with time) 만물을 창조하는 것이라면, 영원과 시간이 접하는 부활은 현대 우주물리학에서 말하는 빅뱅(Big Bang)과 유사하게 시간과 공간 자체가 새롭게 시작되는 특이점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부활과 더불어 누릴 하늘의 영생(eternal life)은 우리의 생명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시간이 무한히 지속되는(everlasting) time)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로 분절되어 경험되는 지상의 무상한 시간의 계기들이 모두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eternal now)로 수렴되고 승화되는 영원한 삶이다.

 

우리의 물질적 몸이 변화하여 영의 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물질세계 자체가 변화하고 영화된다(spiritualized)는 것을 의미하며, 물질 자체가 변화되면 공간도 변화될 것이고 시간 자체도 변화될 것이다. 하늘나라의 영생은 우리의 몸, 물질, 시간, 공간 등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으로 새로워지고 하느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영화로운 세계 속의 삶일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이다. 우리는 영의 몸으로 이 영화로운 하늘의 세계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성서적 신앙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축복이다.

 

사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여기저기 나타나셨다는 현현사화들이 암시하는 진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복음서나 바울 서신이 전하는 예수의 현현(epiphany) 이야기들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며, 스승의 감화를 받았던 제자들이 스승을 너무나 간절하게 사모한 나머지 본 환상도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광의 몸, 영의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영의 몸으로 장차 하늘나라의 영화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누릴 모습을 미리 예시해주는(prefigure) 사건들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중세시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영생을 우리의 불멸하는 영혼이 사후에 지상에서 지녔던 몸의 제약을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영혼이 되어 영원한 하느님을 침묵 속에서 관조하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 최고의 행복으로 간주했다. 지상에서도 그러한 삶을 추구하는 삶이 세속적 활등을 하는 활동적 삶(vita activa)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마치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에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하는 더 순수하고 완벽한 철학적 삶이 가능하게 되리라는 희망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인 것과 유사하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성서와 사도 바울의 부활신앙과는 무관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믿는 영생은 영혼이 육체를 쏙 벗어나 영혼 홀로 누리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지상에서 살았던 몸과 마음, 육체와 영혼 모두가 하느님의 영으로 변화된 새로운 존재(new being)로서 누리는 영원한 삶이다. 그렇지 않고 영혼만이 영생을 누린다면, 우리가 지상에서 몸을 가지고 살고 행동한 삶은 영원히 사라지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만약 내세라는 것이 없고 지상에서 사는 현세만이 전부라면, 만약 하늘이라는 하느님의 영원한 영역이 허구이고 지상의 세계만이 전부라면, 현세는 과부하가 걸리기 쉽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끼리 갈등과 대립이 끝없이 계속 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역사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아예 포기하고 냉소주의자가 되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행복에만 관심을 쏟다가 가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소극적이고 냉소주의적인 인생관을 갖고 살기 쉽다. 반면에 현세를 무시하고 내세에만 관심과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삶은 현세를 가볍게 여기고 무의미한 것으로 여김에 따라 현실 도피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다. 이 양자의 폐단과 유혹을 극복하는 길은 지금 여기서, 즉 현세에서 영생을 사는 길이다.

 

부활과 영생은 종말적 사건이지만, 이 종말적 사건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미새로운 존재로 사는 영적 부활(spiritual resurrection)의 삶이다. 지금 여기서 전개되는 나의 삶에서 낡고 부패한 지금까지의 자신을 과감히 부정하고 청산하는 삶,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우리의 겉 사람은 죽고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삶이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현세에서 이미 영적 부활의 삶을 맞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내세에서 주어지는 영생도 누리지 못할지 모른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영(pneuma)을 받아 변화된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이미 지금 여기서 사는 영적 삶이며, 영생 또한 내세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매 순간 누릴 수 있는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과 영생은 단지 우리가 죽어서 어떻게 될까, 어떤 운명이 우리를 기다릴까 하는 <사후세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현세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어떤 삶을 사느냐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살아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생명의 영, 부활의 영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새로워진 새로운 존재로서 이미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것이 예수께서 하신 수수께끼 같은 말씀,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일 것이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뜻하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바울은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에 따라 사는 새로운 존재로서 지금 여기서 사는 영생의 삶에 대해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고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변혁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대단한 삶은 살지 못한다 해도, 하나의 작은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고 썩어서 열매를 맺는 삶을 현세에서 산다면, 우리는 이미 지금 여기서 영생을 맛보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그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12: 23-26). 십자가의 고통과 부활의 영광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다가 간 많은 사람들의 감동적인 삶과 죽음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그런 유명한 인물들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온갖 압박과 유혹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기꺼이 스스로 작은 밀알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작은 예수(little Jesus)들이 많다. 이들이야 말로 인류의 희망이고 예수처럼 장차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을 대변해줄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영생을 이렇게 지상에서 누리는 새로운 영적 삶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부활과 영생에 대해 절반만 아는 것이다. 부활과 영생은 죽음 이후에 더 완벽하게 주어지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카라마조브가의 형제들>을 다시 한 번 손에 잡게 되었다. 이 소설은 본래 도스에프스키가 2부작으로 계획했던 소설인데, 그가 자신의 이상형으로 그리고자 했던 아름다운 청년 알로샤의 모습을 그린 책이다. 방금 전에 읽은 한 알의 밀알에 대한 요한복음의 말씀은 아마도 도스토엪스키가 가장 사랑한 성경 말씀일 것 같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누차 등장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엪스키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원 영성의 참 정신을 구현한 조시마 장로 알로샤가 흠모하는 스승이기도 한 - 의 입을 빌려 예수님의 이 밀알의 영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요한 것은 오직 손톱만큼 작은 씨앗일 따름입니다. 그것을 평민들의 영혼 속에 뿌리면 죽지 않고 그들이 평생토록 살 것이며, 암흑이나 죄의 수렁 속에서도 밝은 점처럼, 위대한 기억처럼, 그들의 내부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또 소설 끝에 나오는 에필로그에서 알로샤는 자기를 무척 좋아하고 따르던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소년 일루샤(Ilusha)가 죽자,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에 알로샤는 추모의 말을 통해 소년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아이들이여, 사랑하는 벗들이여,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뭐든 참되고 좋은 일을 한다면 삶이란 정말 좋은 것입니다.” 그래요, 그래요! 소년들이 환희에 차서 이렇게 반복했다. “카라마조브 씨, 우린 당신이 정말 좋아요라고 급기야 참지 못하고 이렇게 외친 건 콜리아(Kolya)였다. “우리는 당신이 정말 좋아요, 정말 정말 좋아요!” 다른 소년들도 전부 호응했다. 대다수 소년들의 눈에는 눈물이 반짝였다. ‘카라마조브 만세!’ 콜리아가 환희에 차서 외쳤다. “그리고 죽은 소년을 영원히 기억합시다!” 감정에 북 바쳐 알로샤가 다시 덧붙였다. “영원히! 다시금 소년들이 말을 받았다. “카라마조브 씨, 콜리아가 외쳤다. 진짜로 종교에서 말하듯, 우리 모두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생명을 얻고 서로서로를, 모든 사람을, 일류샤를 다시 보게 될까요?” “꼭 되살아나서 다시 보게 될 것이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즐겁고 기쁘게 서로 이야기할게 될 겁니다.”고 반쯤은 웃으면서, 반쯤은 환희에 차 알로샤가 대답했다.”

 

정말로 이 아이들이, 그리고 인생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죽은 무수한 어린이들이 하늘나라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이고, 우리 모두가 궁금해 하는 문제이다. 아이들이 하늘에서 만나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려면, 지상에서 삶을 나누었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각기 개인으로서의 차별적 정체성(identity)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고, 지상에서 살았던 삶의 기억도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을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백한다. 그리고 이 몸은 영의 몸이라고 바울은 강조한다.

 

우리가 영의 몸으로 사는 하늘의 영생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것은 몸과 물질과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사라진, 그리고 지상의 삶을 살았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삶이라면, 도대체 우리가 현세를 산 의미는 무엇일까? 왜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세상에 나게 해서 이 시련 많은 삶을 살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사는 하늘나라의 영생은 그런 텅 비고 추상적인 세계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천국에서도 행복이 있으려면 불행했던 지상의 삶에 대한 기억만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며, 기쁨이 있으려면 슬픔과 고통도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덧없는 흐름이 천국에서는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로 수렴되고 승화될 것이지만, 시간 속의 경험들에 대한 기억은 변화된 것이라 해도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이다.

 

적어도 중세 시대까지는 하느님을 믿는 세계 모든 신앙인들은 이러한 영원한 하늘 혹은 천국 영생을 굳게 믿고 살았다. 하지만 현대세계로 오면서 서구에서는 니체,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 같은 수많은 기라성 같은 무신론 사상가들이 나타나서 이 하늘만 공격하면, 그것이 허구임을 밝히기만 하면 기독교 신앙은 끝장난다고 생각하고 집요하게 공격했다. 하늘같은 것은 없으니 그런 허구에 목매고 살지 말고 땅을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메시지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사랑하고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말고 보이는 인간을 사랑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종교란 멀쩡한 인간을 바보로 만들고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사기라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비판했다. 종교는 어리석은 민중의 아편이며 어리석은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환상이라고,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만들어진 신의 저자 도킨스 같은 진화생물학자는 최근에 그런 고발에 앞장섰다. 사실 도킨스 책의 원 제목은 신이라는 망상’(God delusion)이다! 번역자가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문자 그대로 번역했다간 극성맞은 기독교 신자들의 손에 맞아죽겠다고 생각해서 적당히 타협해서 제목을 뽑은 것 같다. 또 최근에 생을 마감한 무신론자 호킹 박사는 세계의 존재와 구조는 창조주의 존재를 상정할 필요 없이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필연적이고 자명한 체계라는 점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평생 애를 쓴 과학자로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 자신의 의사가 어떠했는지 잘 모르지만, 마치 저 세상을 믿는 듯 그의 유골은 뉴턴과 다윈과 나란히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된다고 한다!

 

다시 핵심 문제로 돌아가 보자. 그러면 아이들이 정말 사후에 다시 만나서 기쁨을 나누는 새로운 세계는 어떤 세계이며, 영생을 누리는 새로운 삶은 어떤 모습일까? 신학에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신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잘못이니까, 그런 언사보다는 차라리 신이 어떠어떠하지 않다고 말하는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을 사용해서 말하는 편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신학 방법론이다. 부활과 영생에 세계에 대해 논하는 나 자신도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일단 이러한 부정의 길을 따라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하늘의 세계, 영생의 세계에 대해, 적어도 하늘나라에는 어떠어떠한 것이 없을지, 어떤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천국은 만악의 근원과도 같은 이라는 것이 없는 세계일 것이 확실하다. 모두 동의하시지요?,

 

둘째, 천국에는 개인들이 각기 자신의 차별적 정체성(personal identity)을 지니고 존재하겠지만, 지상에서 온갖 대립과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는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천국에는 우선 혈연, 학연, 지연에 얽힌 집단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나아가서 국가라는 정체성(national identity)이라는 것도 없을 것이고 국가 간의 장벽이나 인종 간의 장벽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도 다 동의하실 것 같다. 그리고 개인들은 있어도 그들 간의 차이가 이기적 갈등이나 대립이 되지는 않는 아름다운 조화의 세계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하늘나라의 모습을 불교의 화엄사상에서 배웠다. 하늘나라는 사물과 사물 사에 아무런 막힘과 장애가 없이 만물이 서로 소통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 보편적 사랑의 세계일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가족이라는 제도가 존재할지 궁금해진다. 하늘나라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그리고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 - 바울 사도의 생각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복음서에 있는 것을 보면,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가족이나 친족(kinship) 집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지상에서 한 가족이었기 때문에 덩달아 영생을 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할머니들이 툭하면 하는 말, ‘아이고 내 새끼는 천국에서는 더 이상 안 들어도 될 것 같다. 아니 제발 안 들었으면 좋겠다.

 

결론적으로, 천국에는 온갖 이기심을 정당화하고 집단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집단, 특히 지상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장벽을 만들고 편을 가르게 만드는 종교공동체나 교회공통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애완동물이 없는 천국은 천국이 아닐 것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법하다. 이런 생각은 결코 웃을 일은 아니다. 만물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느님께로 만물이 귀환하면, 만물은 하느님 안으로 수렴되고 승화될 것이다. 영생의 세계는 따라서 인간만 존재하는 단조롭고 재미없는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동식물도 존재할 것 같다. 예부터 천국은 기화요초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garden)의 이미지로 그려져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선지자 이사야의 비전도(116-9) 그러한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 때에는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이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참으로 평화롭고 다양한 피조물이 등장하는 매우 풍부한 세계를 꿈꾸고 있다.

 

만약 하늘나라가 현세를 살았던 우리들의 모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라면 우리가 그런 곳에서 무슨 기쁨, 무슨 행복, 무슨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더 심각한 문제는, 천국이 그렇게 좋다면, 그리고 덧없는 현세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원하고 고요한 세계라면, 도대체 우리는 이 지상의 소란한 삶을 무엇 때문에 살았으며,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현세의 고달픈 삶을 살도록 하였을까 의문이 든다. 또 그러한 천국은 지상에서 억울한 삶을 살았던 자들에게 결코 보상이나 위로가 되지 못할 것 같다.

 

영원한 하느님과 함께 하는 하늘나라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분절되는 지상의 덧없는 시간은 아닐 것이고, 영생은 우리가 지상에서 살았던 삶의 경험이 완전히 사라지고 무화되는 삶은 아닐 것이다. 하늘의 시간은 지상의 덧없는 시간의 계기들이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eternal now)로 수렴되고 승화되는 시간 아닌 시간, 영원한 시간일 것이다. 시간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만물이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느님께 되돌아간다면, 만물 역시 시간과 함께 하느님 안으로 수렴되고 승화되어 질적 변화를 받을 것이다. 영생이 전개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다채롭고 아름다운 세계일 것이다.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생도 현세를 살고 간 사람들의 몸과 영혼, 경험과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고 만 적막한 세계, 시간의 세계를 산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고 무의미하게 되는 세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영원하신 하느님의 빛으로 채색되고 영화롭게 되는 찬란한 세계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부활은 최후심판(Last Judgment)을 수반한다는 것이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지옥은 존재하는가? 나는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 최근 교황은 지옥은 없다고 대담하게 선언하셨고 몸과 영혼이 완전히 소멸해버리는 죽음 자체가 지옥이라고 보는 일부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의 견해를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나는 이러한 견해에 찬동할 수 없다. 사후에 지옥은 있지만, 영원한 지옥은 아닐 것이다. 현세에서 우리가 짓는 죄악이 아무리 크기로서니 지옥의 영원한 벌을 받을 만한 악은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지옥의 고통을 주는 하느님은 결코 정의의 하느님도 아니고 사랑의 하느님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또 악하게 사는 사람들의 악행을 하느님이 하늘에서 지켜보시다가 사후에 그들을 심판하여 가두고 벌을 주기 위해 어디엔가 만들어 놓은 감옥과 같은 특별한 공간이 아니다. 그런 유치한 생각은 옛날 무지했던 시절에나 통했던 것이다. 나는 사후에 우리 모두가 받는 심판은 완전히 자업자득의 질서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불교와 힌두교의 업보사상에서 차용했다. 나는 그러나 업보의 질서가 현세의 질서는 아니고 사후 세계의 질서라고 믿는다. 업보가 현세의 질서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완전히 정의롭고 정당한 세상이라는 말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고 자칫 허위의식을 조장한다. 나는 우리가 사후에 받는 벌은 각자 자신이 지은 죄악에 합당한 자동적인 자기 처벌(self-punishment)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을 대면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자기처벌이다. 지옥은 악하게 살다가 간 어둠의 자식들이 하느님의 빛의 현존을 감당하지 못해, 혹은 하느님의 밝은 얼굴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하느님을 피해 도망치고 스스로를 가두고 괴로워하는 과정일 것이며, 이와 동시에 자기가 산 지상의 삶 전체를 회고하면서 참회의 눈물도 흘리고 아파하는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영원한 벌이 아니라 잘못된 삶이 참회를 통해 거듭나는 절차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악인들도 하느님께 나아가 하느님의 품에 안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만인의 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을 믿는다. 사랑의 하느님은 끝내 악인의 죄를 이길 것이고 악을 선으로 바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치 망한 기업이 회생절차를 밟아 또 하나의 기회가 주어지듯이 지옥은 악인들에게 사후에 주어지는 회생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인간의 사후 운명을 영생과 영벌로 재단해온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최후심판 사상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 며, 이제 과감하게 폐기할 때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지옥은 없다는 교황님의 말씀은 실로 놀랄만한 선언이다. 나는 사후의 심판과 벌을 믿지만 패자부활전이 없는 극히 잔인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내세관은 거부한다. 인간의 상식에도 맞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도 반하기 때문이다.

 

지옥과 달리,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영생의 지복은 우선 하느님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도 만나 뵙기를 원하던 그의 아들 예수의 얼굴을 대하는 삶일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visio dei), 바울의 표현대로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하느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face to face) 볼 것이며,” 모든 의심의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하느님을 즐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통적으로 약속하는 사후의 지복이며 축복 제1호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했던 괴롭고 슬펐던 기억들은 하느님의 찬란한 빛으로 채색되어 아름다운 기억으로 승화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젊은 시절 경험했던 고생스러웠던 삶의 기억이 나중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하듯이 지상의 삶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시간의 순간들은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eternal now)로 수렴되고 승화될 것이다. 영생의 삶에서는 지상의 삶을 특징짓는 선과 악의 치열한 대립은 상대화되고 극복될 것이며, 고통과 즐거움도 모두 참 선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힘을 잃고 하느님이 발하는 찬란한 빛에 채색되어 아름다움으로 전환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문제이기도 해서 잠시 언급한다. 즉 언제 몸의 부활, 영적 전환이 일어나고 최후심판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미 부활이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시간과 영원의 경계선에 있는 사건 아닌 사건이라고 했다. 따라서 부활의 시점을 논한다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하지만, 부활이 하나의 사건인 이상 시간의 세계를 사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문제이다. 루터 같은 이는 죽은 자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얼마나 오래 무덤에 머물다가 부활하는지는 무의미한 문제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숨을 거두는 순간 즉시에 심판의 과정이 시작되고 영생의 세계로 옮겨진다고 믿는 편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집착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정말로 죽어본 사람은 없고 임사체험(NDE)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죽은 것이 아니다! - 천국을 본 사람도 없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믿기 어렵다.


천국은 지상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미지의 세계이다. 이 미지의 세계에 대해 나는 오늘 너무 많은 말을 함부로 한 것 같다. 무척 궁금하고 중차대한 문제이지만, 성경에도 가르침이 빈약하고, 너무나 많은 오해와 혼란스러운 견해가 난무하기에 많은 말을 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라면서 말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