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는 자막이 연달아 올라갈 때, 영화를 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자문해 보는데, 갑자기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는 제목의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었던
저 연탄재를
누가 발로 함부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뜬금없이 왜 이 시가 생각나는지 곰곰히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 감상후기를 쓰는데 뭔가 단서가 잡힐 것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진눈개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아침, 출근 길에서 높은 다리 난간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려는 한 여인을 구하지만, 그녀는 붉은색 코트와 작은 책 한 권, 그리고 그 안에 리스본 행 열차 티켓을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꽉 짜여 진 일상에서 불쑥 뛰쳐 나와 리스본 행 열차에 몸을 실은 그레고리우스(제리미 아이언스)는 코트 속에 있던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작은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프라두(잭 휴스턴)의 과거 행적을 찾아 나서는 여행자가 됩니다. 그러면서 그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게 됩니다. 책의 저자 아마데우 프라두는 누구이며, 그 책에 쓰고 있는 내용들이 뜻하는 바가, 현재를 살아가는 고레고리우스 자신에게 도전으로 다가오는 이유를 호기심을 가지고 따라가는 과정이 바로 영화의 전개 과정입니다. 아마데우 프라두와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생기는 궁금증이 바로 관객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가 듣는 이야기가 바로 그 궁금증에 대한 답입니다.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의 이야기와 책의 내용을 퍼즐 맞추듯이 찾아 가는, 뜻하지 않게 일상의 틀에서 뛰쳐 나온, 그레고리우스는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중년의 신사 이미지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듯 합니다. 화려하지 않은 옷과 어딘지 어수룩하면서도 대범하지 못한 모습이 보통 사람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고리타분하다 못해, 스스로 '지루하다(boring)'고 말하는 그였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뭔가를 찾아 나선 여정 위에서는, 우연히 만난 여자 안과 의사(독일 배우, 마르티나 게덱)와는 쉴 새 없이 말을 늘어 놓게됩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당신은 절대로 지루하지 않아요'라는 의외의 말을 듣게 되고 시간이 걸리지만 점점 익숙해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화를 다 본 후, 뜬금없이 안도현의 시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가 생각이 난 건, 아마도 삶을 열정과 도전으로,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서 살아냈고 또 그런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한 영화 속 작은 책의 저자, 아마데우 프라두의 이미지가,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리고 뜨겁게 타 버린 연탄재의 시적 이미지와 겹쳐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는 것, 그리고 삶의 열정과 도전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삶이 바로 우리가 동경하는 삶이요, 아마데우 프라두가 꿈꾸는 삶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 삶을 요약해 놓은 작은 책이, 현재를 살아가는 그레고리우스가 동경하면서 호기심으로 따라가는 여정이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삶의 열정과 도전, 뜨거움이 가득찬 삶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혁명'이라든지, '레지스탕스 활동' 보다 더 극명한 건 없을 것입니다. 포르투칼의 카네이션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여느 영화처럼 혁명 자체를 극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열정과 도전, 진실과 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극적인 소재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그 이미지와 상황으로만 대변을 합니다. 비밀 경찰 멘데스와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는 아마데우 프라두와 그 주변 몇 명의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려 줄 뿐입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현재와 과거를 연결시키는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일상을 벗어나서 과거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지만, 그 여행이 댠지 과거로의 여행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고루한 일상의 삶으로부터, 열정과 뜨거움이 있는 현재의 여행을 계속하도록 하는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갑자기, 자리를 잘 지켜주던 교사가 증발되어 버린 일상의 학교 현장을 대변하는 카기 교장 선생은 애타게 그레고리우스가 돌아오도록 종용하지만 일단 열정의 여행 속에 뛰어든 그는 몇 번씩이나 단호하게 교장의 전화를 끊어버리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화 속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국적인 포르투칼의 풍광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백미입니다. 오래된 호텔,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유람선, 경찰에 쫓기는 아마데우가 내달리는 골목길 등 한 장면 한 장면에서 리스본의 아름다움이 묻어납니다.
리스본 역 플랫폼에서, 진짜 돌아갈거냐고, 이곳에서 머물지 않겠느냐는 여인의 제안이 마치 오늘, 내 귀에도 들려 올 것 같은 기대감이 들게 하는 마지막 장면이 여운에 남습니다. 김 빠진 맥주처럼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열정이 가득한 삶으로 초대하는 속삭임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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