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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 방한 인터뷰

석전碩田,제임스 2014. 10. 22. 14:46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 한국교회에도 ‘가나안’ 성도라는 말까지 생겼다.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한국교회가 지금 겪는 현상은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초반부에 등장하는 교회나 바울서신의 고린도와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한 묘사를 보라. 교회는 흠이 있는 개인들로 채워진 곳이다. 이렇게 문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음의 메시지를 위임한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영광이자,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위기다.

가족을 예로 들어 보자. 한국 사회는 가족을 돌보는 좋은 전통이 있다. 그러나 모든 가정에는 별난 사람들과 무책임한 일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인연을 끊고 살겠는가. 그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과 관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교회 문제들을 감안할 때 실망과 화가 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본다. 그러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때때로 우리는 교회를 무엇인가를 채워주는 곳이 아니라 온전히 주는 곳으로 보아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은 성숙을 향해 가는 영적 훈련이다. 나는 교회가 문제로 가득하고 그 중 일부는 교회로부터 잠시 한 발 물러날 필요가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떠난 사람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 불에서 꺼낸 숯은 차가워지기 마련이다. 성숙한 한국 기독교인이 교회 안에 남아서 개혁과 새 생명 운동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오늘날 유럽의 많은 교회가 그렇듯이 텅빈 유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교회가 인간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약할 수밖에 없으며 기대와 희망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책에서 계속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시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권위를 가진 자들에게 어려운 것이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일이다. 하지만 매우 강력한 힘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는 한국은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권위주의적 리더도 있었던 것으로 한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한 개인이나 교회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 될 때는 해외선교 활동을 찾아보는 것이 제일이다. 한국에서 시작된 선교운동이 교회를 살릴 수도 있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나는 한국인 선교사를 만난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환영받지 못한 곳에서 환영받는다. 나는 특별히 젊은이들이 단기선교를 떠나 주님께서 극적으로 역사하시는 현장을 목도하라고 권하고 싶다. 단기선교가 믿음을 장려하고 자신의 교회에 돌아가 새 생명을 불러올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쉬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기도의 행위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나는 여러분들이 주님께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지나간 문제에 올바른 수정을 할 수 있는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는 지난 4월 세월호의 침몰 이후에 여전히 고통 중이다. 대형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보며 신앙적 회의가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사고가 일어나느냐고 묻는다.

“인도의 뭄바이 폭발사고나 미국의 대량총격전과 같은 비극을 겪은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었다. 나의 책 ‘하나님 내게 왜 이러세요’에는 쓰나미 이후의 일본과 잔인한 전쟁 이후의 사라예보, 그리고 학교 총기난사 사건 이후의 커네티컷 주의 뉴타운 등 세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시발점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고통을 받는 자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들 편에 서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주께서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세월호의 재앙과 그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느끼고 계신지 알고 싶다면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 예수님께서 자식을 잃은 과부에게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보면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슬퍼할 때 주님은 더 많이 슬퍼하신다.

나는 또 교회만이 유일하게 위로와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 우주를 우발적으로 생긴, 차갑고 무자비한 곳으로 보는 무신론자들은 고통 받는 자들에게 전할 희망이 없다. 국가적인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의미가 있으며 죽음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그들은 다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온다.

기독교는 부활을 믿는다. 이것이 내가 뉴타운의 부모들 앞에 서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이 주님의 팔에 안기어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을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예닐곱 살 된 자녀들이 잔인하게 살해된 부모들에게 그 말씀은 생명선과도 같은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줄 수는 없다. 물론 우리에게 일어난 비극을 조사해 볼 때 세월호 사건이나 우크라이나 영해에서 피격된 말레이시아항공기 같은 경우에는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지나치게 고통의 원인을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간에 주님께서 이 비극을 사용하셔서 선한 결과가 있을 수 있기를 구하는 게 더 유익한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께서 전 세계 곳곳에서 그렇게 역사하신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여전히 교회가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내 경험상 교회는 위기 가운데서 가장 밝은 빛을 발한다. 내가 쓴 다른 책인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 교회는 어디에 있었나요’ 라는 말로 바꿔도 좋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 등에서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최전방에 있다. 일본에서는 기독교 그룹이 쓰나미 피해민들을 위해 집을 짓고 있었으며 사라예보의 기독교인들은 사라예보가 4년 동안 포위되어 있을 때에 대부분의 이웃들이 떠난 그 곳에 남아 있었다. 커네티컷의 뉴타운에서도 교회들이 상담을 제공하고 미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모금활동을 했었다.

나는 한국교회가 세월호 재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허리케인이나 태풍이 미국을 강타했을 때 교회가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을 보아왔다. 1년 전 내가 사는 콜로라도 주에 지독한 홍수가 터졌다. 지금도 메노나이트 교회팀들과 다른 교회팀들이 자비를 들여 거주하면서 주택 재건에 힘쓰고 있다.

공동체는 위기를 맞을 때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수술을 받아야 하거나 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끼니를 공급하고 재정을 지원하며 그들 자녀들이나 애완동물을 돌봐준다. 많은 연구 결과들은 교회공동체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건강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에 빨리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 한국교회는 지도자의 부재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영적 지도력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한 접근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새로운 지도자를 개발하는 것이다. 교회들이 좀 더 신중하게 후보를 찾은 후에 더 이상의 남용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윤리적 울타리를 잘 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접근 방법이다. 그리고 여러분도 이미 이 접근을 시작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실패와 과실이 엄습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흠 있는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슈퍼맨 리더를 찾는 일은 불가능해서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 두 제자를 생각해 보자.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

두 번째 접근법은 교회를 바닥부터 위까지 다시 세우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기독교인들에게 소그룹모임과 훈련, 그리고 성경교육을 통해 권한을 부여한다. 교회의 능력은 리더 자체에 있기보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의미를 삶으로 보여주는 예수님의 평범한 제자들에게 있다. 나는 지금 제도적 교회의 구조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건강한 교회의 생명은 아래로부터 오는 경향이 있다. 리더들은 에너지의 방향을 조정해 주는 역할만 한다.

어쩌면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국교회가 리더들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목사님들의 업무량을 보라. 많은 목회자들이 주일 설교 준비와 업무, 새벽기도회를 위해 매일 말씀을 준비한다. 마른 우물에서 계속적으로 물을 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시점에서는 리더들의 영혼이 재충전되어야 한다.”

- 당신은 엄격한 미국 남부 근본주의 교회에서 자랐다. 외적인 것에 기초한 종교는 버리기도 쉽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오늘날 교회가 버려야 할 위선은 무엇인가.

“모든 기독교인들이 모든 문제에 동의할 수는 없다. 술을 마시는 것이 죄인가. 문신을 새기는 것은 어떠한가.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런 문제에 끌려 다녔다. 사도 바울 시대에는 제사 음식을 먹는 문제와 이방인들의 휴일을 기념하는 것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주변적 문제를 집중하는 것에 대해 위험성을 지적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만난 자들 중 가장 엄격한 그룹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가장 강력한 비난을 하셨다.

예수님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즉 내부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는 측정하기 쉽다는 이유로 외형에 지속적으로 의지한다. 기준에 못 미친다고 덜 영적인 사람들로 치부하고 그들보다 우월하게 느낀다. 이는 요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가장 큰 계명이다.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진정한 질문은 가족들과 믿는 형제자매들,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과 우리의 적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자기들만의 기준을 세워놓고 나에게 따라 하라고 강조하던 기독교인들에게 반항하곤 했다. 예를 들어 1960년대에는 머리카락 길이가 큰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달라졌다. 나는 그들이 기독교 영성을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엄격한 자부심을 배재한 채 믿는 자들을 멸시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그들은 말씀으로 돌아가 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행하신 예수님의 꾸지람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해야 한다.”

-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으로 양분돼있다. 교회 역시 보수, 진보로 나눠진 경향을 보인다. 분열된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오셨다고 증거한다. 교회는 스스로 ‘고귀한 진리(the most truth)’를 가지고 있는 곳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토록 많은 교단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교단은 그 교단만의 고귀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교회가 진리의 교회로 경쟁하듯 은혜의 교회로 경쟁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여기서 은혜의 교회란 버림받고 가난하고 위험한 인물과 범죄자 등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에게까지 다가가 손을 내미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이 더러운 손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있을 때에는 이념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은 자신의 진리 기준과 타협하지 않고서도 세상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들까지도 끌어당길 수 있는 분이셨다.

우리는 자신에게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적은 교단이나 다른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가난과 불의, 성 매매, 폭력, 절망 가운데서 행해지는 악한 세력이다. 누가복음 4장의 예수님의 첫 설교와 예수님께서 택한 사명을 기억하라. 모든 교회들이 손에 손을 잡고 그러한 적들과 싸울 때 우리의 차이점은 줄어들 것이다.”

-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도전으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를 꼽는다. 당신이 볼 때 교회의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인가.

“가장 큰 도전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잊는다는 것이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나는 복음이 살아 숨쉬고 진정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교회를 봐왔다. 그들은 일종의 ‘신혼여행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 교회는 삼성이나 코카콜라 같은 영속적 기관이 된다는 것이다. 이들 기관은 사역을 위해 전문인들을 고용하고 커다란 건물을 세우며 같은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하나님의 영은 한 곳에 담겨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모르는 바람처럼 움직인다. 리더들은 바람에 귀 기울여 듣고 분석하는 ‘기상 예보관’ 같아야 한다. 리더는 하나님께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계신가. 우리는 그 바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우리의 목적과 부르심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한국에는 신자 1만명이 넘는 대형교회를 비롯해 100명도 안 되는 작은 교회들도 많다. 어떤 지도자들은 교회의 크기에 따라 고유 역할이 있다고 말한다. 교회가 반드시 가져야 할 요소는 무엇인가.

“나는 교회의 크기에 관한 한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들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대형교회들은 교회가 가진 질적인 면을 관리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또 자본이 있어서 멋진 건물들을 지을 수도 있고 훌륭한 음악인들과 좋은 자질의 목회자들을 고용할 수도 있다. 게다가 대형교회는 지역사회 안에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작은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알아가게 되는 장점이 있다. 그 안에서 교인들은 서로의 필요를 알게 되고 지원도 가능하다. 확대가족 같은 관계가 될 것이다.

내 경우는 훌륭한 음악과 멋진 설교 말씀을 전하는 2000명 규모의 교회를 다녔었다. 그런데 몇 번의 슬픈 경험을 겪은 후에 교인 수는 줄어들어 160명가량 남았다. 우스갯소리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돕는 교회 성장기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 빌딩을 잃어버려 현재는 학교 카페에서 모임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전보다 더 건강하게 서로를 돌보아주고 함께 ‘묶여’ 있다.

교회의 핵심 요소라면 3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다양성이다. 교회는 서로 다른 나이와 민족, 그리고 사회계급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다. 둘째는 하나됨(연합)이다. 이러한 다양한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께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사명이다. 사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해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주라는 공동의 목적(이유)를 가진다.”

- 한국교회는 미국교회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교회의 실수로부터 한국교회는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보는가.

“나는 이번 한국 여행을 통해 미국교회가 한국교회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주의해서 보고 싶다. 미국인으로서 자기만족과 방종과 같은 미국교회의 흠을 지적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강점은 있다. 교육과 구제 사역에 대한 인프라가 잘 구성돼 있고 단기선교 봉사활동이라는 훌륭한 전통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교회 밖의 문화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더 재미있는 교회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교회 스스로 저절로 존재하는 영속 기관이 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부흥이 지속될 수 있는가. 어떻게 생명이 지속되게 할 수 있는가. 교회 역사는 주기적으로 반복돼왔다. 나도 한국에 있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주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여러분은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고 이제는 속도가 줄어들고 정체되는 현상을 겪고 있다.

그러나 미국을 바라볼 때 고무스러운 점은 영적인 바람이 난데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운동 카리스마운동 소그룹운동 경배와찬양 이머징교회 등에 대해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그냥 일어난 것이다. 리더들은 그것들을 시험해보며 가치 있는 부분은 권장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막을 책임이 있다. 물론 어려운 도전임을 알고 있다.”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방한 기간 동안 베이비박스를 설치한 주사랑공동체교회도 방문하는 것으로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의 사명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삶을 정착시키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베이비박스는 정말 아름다운 사례이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낙태 문제를 접근할 때 시위를 하거나 정부에 로비를 하고 시위하면서 외치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여기 한국의 한 교회는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 아이가 환영받고,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초대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주시하고 있는 세상은 그 목사님을 통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계시며 그가 가진 것(예수님)을 나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복음은 퍼져나갈 것이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당신은 글쓰기에 대해서도 강의한다. 글쓰기와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기독교인들은 항상 ‘책의 사람’들로 알려져 왔다. 종교개혁도 인쇄기가 발명되는 같은 시기에 시작했다. 나는 믿음과 저술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술보다 더 친밀하면서도 덜 위협적인 의사소통수단을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책을 집어 들면 나는 독자로서 이 책을 통제한다. 싫어하면 닫으면 된다. 그래서 저자는 비강제적인 방법으로 독자들이 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항상 독자가 통제하기 때문이다.

사도요한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으로 가장 친밀하게 보이셨다는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죽음과 파멸, 공포스런 이미지를 허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친밀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형상으로 오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 얼마나 아름다운 형상인가. 우리는 믿음을 겸손하지만 능력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국민일보, 2014년 9월 19일자>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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