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독후감·책·영화·논평

[영화]로맨스 조

석전碩田,제임스 2012. 3. 13. 15:00

2주 전, 광화문에 있는 씨네 큐브에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잠시 들렀던 피잣 집의 씬(Thin) 피자가 먹고 싶어 지난 주 일요일 저녁 또 그 곳을 찾았다가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듯이 영화 한 편을 감상했습니다. 

 

<로맨스 조>..영화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갖지 않은 채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문외한으로서 이 영화를 다 본 후에 느껴지는 것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막바지, 다방 종업원인 두 여자의 대화가 그 힌트를 줍니다. 지방대 국문과 출신의 다방 종업원 언니가 후배에게 말하는 조언입니다.  "이제 몸으로 돈 버는 시대는 갔다. 차 한 잔을 팔아도 고객이 어떤 이야기를 원하는지 생각해 가면서 그에 맞게 이야기를 해야 팔 수 있다. 그러니 머리를 쓰라"는 조언. 바로 이 조언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주제>라는 암시를 던져 주는 듯 합니다.

영화는 씨네 21 신인발굴 프로젝트 당선작이라는 자막으로 시작이됩니다. 그러나 도입부터 관객들을 혼란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아들을 찾아 온 노 부부가 무슨 일인지 모텔 방으로 들어옵니다. 사라진 아들 대신 친구가 등장해 일주일 전에 있었던 아들과의 술자리에서의 대화를 이야기해 줍니다.  장면이 바뀌면서 이제 영화를 접겠다고 다짐하는 남자 곁에 친구가 건성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이 남자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은 또 다른 두 남자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나누는 이야기 장면으로 바뀝니다.  선배로 보이는 프로듀서는 시나리오 작업에 게으른 감독을 구슬리다 시골 외딴 한적한 모텔 앞에 내려 놓고 떠나 버립니다.  이야기를 꾸미는 작업을 하라는 반 강제적인 압박과 함께.

 

 

분통을 터뜨리며 한적해 하던 감독은 시골 다방에 전화를 걸어 커피 배달을 시킵니다. 배달 온 다방 종업원은 커피 한 잔만 배달하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노련한 솜씨로 파악한 후 남자의 갈증을 풀어 줄만한 로맨스 조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댓가로 티켓을 끊도록 유혹합니다. 이 부분까지 영화를 감상하고 나면 관객들은 아, 이제부터 로맨스 조라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가 전개되려나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오산입니다. 갑자기 시골이라는 환경에서 펼쳐지는 풋풋한 학창 시절의 사랑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엄마를 찾아 나선 당돌한 꼬마와 다방 종업원과의 지금 여기에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현재와 과거, 그리고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면서 마치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차차 어느 한 지점으로 수렴되어져 가는 과정이 바로 이 영화의 전개 방식입니다. 그림으로 말한다면, 그림 액자 속에 또 다른 그림 액자가 걸려 있는 장면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므로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바로 이 영화에서 혼란스럽게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한 곳으로 수렴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정도로 수렴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마다 왼쪽 손목에 칼 자국이 공통적으로 있다는 점입니다. 그 칼 자국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면에서 안타까워하며 고통스러워했던 삶의 경험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 모든 인생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삶의 숙명' 쯤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모텔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해야 하는 감독이나, 커피 배달을 하는 다방 종업원이나, 또 갑자기 없어진 아들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서 모텔에 들어 온 노부부나 모두 이야기에 굶주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정작 사람들이 모두 좋아할 이야기, 즉 한 인생을 대박으로 이끄는 화끈한 이야기는 적은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그 이야기 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깊이 공감하는 이야기는 없고, 그저 쑥덕대는 이야기만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죽지 않는 상황에서 천일동안 이야기를 만들었던 '천일야화'를 꿈꾸는 시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영화에서 아직도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여운이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풋풋한 학창 시절의 사랑 이야기가 막 시작되는 즈음..여학생과 남학생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여학생과 관련된 수많은 뒷 담화(이야기)를 확인하려는 남학생과 그 이야기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학생의 심정을 그려낸 시골 신작로 위에서의 대화 장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에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그 모든 이야기 속의 아픔들을 수용하고 이해하며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어 갈 때, 그 이야기는 살리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장면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장면을 계기로 둘은 연정을 키워가면서 풋풋한 청소년기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 분이 했던 이야기들은, 그저 떠 도는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그 이야기 속에 있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야기 속으로 직접 뛰어든 나의 이야기, 풋풋한 로맨스의 이야기였는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