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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문봉선 교수 개인전

석전碩田,제임스 2012. 3. 15. 17:36

[100년 이상 된 먹으로만 그림… 문봉선 동양화엔 천지만물이 생생하다]
중국·일본 옛 먹 경매서 구해 - 심오하고, 짙고… 느낌 다 달라
먹빛은 우주 창조때의 빛깔, 매일 먹 갈며 마음 수양하죠… 묵란 100여점 14일부터 전시

6일 동교동 작업실에서 문봉선 화백이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먹(墨)이라고 해서 다 같은 먹이 아닙니다. 어떤 먹은 다른 먹보다 더 심오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내지요. 먹빛 하나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표현해야 하는 동양화가 입장에선, 어떤 먹을 쓰느냐가 그림의 격(格)을 좌우합니다." 동양화가 문봉선(51) 홍익대 교수가 옛 장인(匠人)이 만든 100년 이상 된 먹만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6일 오후 문 교수의 서울 동교동 작업실 '묵운헌(墨耘軒)'. 오동나무 상자가 열리자 가지런히 누워있던 먹이 검푸른 빛을 발했다. 가로 3㎝, 세로 12㎝, 두께 1㎝가량의 이 먹은 8개들이 한 세트가 우리 돈으로 50만원가량.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의 장인이 1800년대 후반 만든 것으로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서 샀다. "먹은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과 아교를 섞어서 만듭니다. 좋은 소나무를 쓸수록 품질이 좋아지죠." 황실에 소나무를 진상했던 안후이성에서 제작한 먹은 그래서 최상급 먹으로 꼽힌다. 또 다른 상자에는 타원형, 원형, 구름 모양을 내고 금박으로 장식한 화려한 먹이 들어 있었다. 청나라 건륭(乾隆) 50년(1785년) 황실용으로 만들어진 것. 먹빛이 맑아 매화를 그릴 때 주로 쓴다. 일본의 유서 깊은 제조회사 고매원(古梅園) 먹도 안후이성 것과 함께 최상급으로 꼽힌다. 도쿄의 경매에서 어렵게 구한 이 먹을 문 교수는 산이나 바다 같은 검은 풍경을 그릴 때 쓴다. 다른 것보다 먹빛이 짙기 때문.
문봉선 교수는“‘석묵여금’이라는 옛말이 있다. 먹 아끼기를 금처럼 하라는 뜻이다. 귀한 먹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지가 동양화가의 이상이다”고 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일반인들 생각과는 달리 옛날 먹은 작을수록 비싸다. 작을수록 입자가 고와 미세한 농담(濃淡)까지 표현할 수 있기 때문. 문 교수는 "그림의 성패는 담묵(淡墨)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렸다. 담묵의 은근함은 숙련된 화가만이 낼 수 있는 빛깔이다. 좋은 먹은 10단계 이상의 농담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좋은 벼루도 당연히 중요하다. 문 교수는 인사동에서 구한 500년 된 벼루와 중국 광둥성(廣東省) 장인이 만든 벼루 등을 함께 쓴다. "좋은 벼루는 물을 빨아들이지 않아서 시간이 오래 지나도 먹물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 문 교수의 설명.

먹 갈 때 쓰는 물은 생수가 가장 좋지만, 겨울 산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소주나 보드카 같은 독주(毒酒)를 쓰기도 한다. 술의 알코올 성분 덕에 영하 날씨에서도 먹물이 좀처럼 얼지 않기 때문이다.

문 교수는 대학생 때부터 썼던 먹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 노동량을 가늠하는 지표다. "노력 않고 그린 그림을 보고선 '먹 한 자루도 채 못 쓰고 그걸 그렸느냐'고들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그림을 그려도 1년에 먹 하나 채 쓰기 어렵습니다. 먹을 가는 일은 그래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문 교수는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간다"는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다. 그는 매일 먹을 가는 일을 반복하면서 마음을 다듬으면 더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믿는다. 화가마다 먹빛이 다르고, 그림이 깊어질수록 먹빛도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동양 전통에서는 검정(玄)을 오방색(五方色)을 뛰어넘은 모든 빛깔의 근원으로 여깁니다. 먹빛이란 우주가 창조될 때의 혼돈의 빛깔이지요. 그 빛깔로 기운생동(氣韻生動·천지 만물이 지니는 생생한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구현하는 것이 화가의 책무입니다."

그의 묵란(墨蘭) 100여점이 14일부터 내달 1일까지 서울 관훈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청향자원(淸香自遠)'에 나온다. 청 건륭제 때 먹과 강희제(康熙帝) 때 만든 주묵(朱墨) 등 먹 다섯 자루를 써서 그린 2010~2011년 작품이다. 매화(2010), 해송(海松·2009), 매란국죽(梅蘭菊竹·2007), 바람(2002) 등 다양한 소재를 수묵으로 표현해 온 문 교수는 이번 전시에서 사군자(四君子)의 기초인 묵란의 획(劃)으로 돌아갔다. (02)735-9938  

 

 

 

김영원 홍익대 미대 학장, 문봉선 교수, 정연심 교수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