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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조정진 기자의 책갈피-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

석전碩田,제임스 2008. 4. 26. 19:38
“차라리 조용히 이기적으로 살았으면 잃지 않았을 것들을 너무 많이 잃은 것 같아 괴롭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의 인생은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여유가 생겼다. 이런 나의 인생이 때론 섬뜩하기조차 하다….”

노동운동을 하다 해직된 한 노동자가 수기에서 밝힌 심경이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주장하듯, 인간은 유전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물론 인간의 유전자는 매우 이기적이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유전자가 다른 건 아닐 텐데도 말이다. 그런데, 역사는 이 평범하지 않은 이타적 유전자를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내놓으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외친 예수부터, 자신을 30년 이상 감옥에 처넣었던 드 클레르크 전 수상의 손을 잡고 “당신의 손을 잡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힘을 합쳐 아파르트헤이트를 끝냅시다”고 외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은 정말 특이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다.

남들은 대부분 창씨개명에 신사참배를 하며 일제의 황국신민화에 순응할 때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목숨까지 바친 안중근 의사, 이봉창·유관순 열사 등의 유전자도 검사해 보나 마나 돌연변이일 것이다.

여기 또 한 명의 특이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있다. 바로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이다. 여든이 넘은 이 교수는 최근 낸 자서전 ‘겁 많은 자의 용기’(삼인)에서 1973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과 1975년 YH 사건, 1980년 내란 음모 사건 등으로 9년 6개월 동안 해직 상태에 있었고, 5년 동안 영어 생활을 한 ‘민주 투사’였지만 실은 겁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어린 시절에는 허약하고 얼뜨고 눈이 크고 겁이 많았고 시험지만 보면 벌벌 떨었고, 교수 시절에는 전체교수회의 때 벌벌 떨면서 발언했지만, 발언하고 나와서 내 발언을 동료 교수들에게 다시 말하거나 내 발언에 동의와 지지를 구하지 않고 곧바로 내 연구실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벌벌 떨면서도’ 중요한 고비마다 필요한 말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깨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될 최소를 고집하는 최소주의자”라고 자신을 규정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는 지키자는 것. 자서전의 부제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는 이래서 지어졌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고 사는 게 고단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지켜야 할 최소’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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