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독후감·책·영화·논평

상처입은 치유자 - 헨리 나우웬

석전碩田,제임스 2008. 2. 10. 01:07
 

설 연휴기간 동안 오래전 읽은 적이 있던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를 다시 꺼내 읽으면서  이 시대에 사역자로 살아가는 자세를 가다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흔히 사역자라고 하면 목회자인 목사나 신부, 수녀, 스님 등 종교적인 직함을 가진 사람을 생각하기 쉬우나 나우웬은 애초부터 사역자를 그렇게 국한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 사역자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부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사역자’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먼저 명확한 답을 한 후에 이 책을 읽는다면 더 큰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우웬이 말하는 이 시대의 사역자는 누구입니까?

이 답을 하기 전에 <상처입은 치유자> 책 내용 중에서 3장- ‘소망없는 사람을 위한 사역’에서 그가 피력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해보겠습니다.


“리더십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한 사람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생각과 제안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보통 떠올립니다. 우리는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존 에프 케네디, 다그 하마슐드, 찰스 드골 등을 떠올리는데 그들은 모두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리더십을 전혀 행사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상사와 부하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의 리더십을 볼 수 있습니다. 좀더 비공식적인 곳, 예를 들어 놀이터나 동네 불량배들의 모임, 학문적 또는 사교적인 모임, 동호회나 스포츠 클럽 등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리더십이 행사되고 받아들여지는 방법에 따라 결정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나는 리더십이 이루어지는 가장 단순한 구조인 두 사람의 만남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일대일 관계에서 우리는 이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이 견해에서 다른 견해로, 이 확신에서 다른 확신으로 서로를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리더십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또는 얼마나 창조적일 수 있는지 보여 주기 위해 히틀러나 간디의 이름을 들먹일 필요는 없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단순한 형태의 대화 속에서도 리더십은 삶과 죽음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나우웬은 이 시대의 사역자란, 일대일의 만남을 갖는 모든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를 지내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사역자란 “누군가를 만날 수 밖에 없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포함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또 한 사람의 사역자로 살아가기로 삶의 비전을 정한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한 사람의 사역자로 살아가기로 삶의 비전을 정한 사람’이 누구냐는 반문을 하실지 모르지만, 나우웬은 이 책을 통해서 결국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명확한 진단 없이는 사역자로 바르게 사역해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나우웬은 책 전반부에서 이 시대를 탁월한 통찰력을 가지고 먼저 진단해 내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이 시대의 증상은 ‘핵인간’이라는 말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핵인간의 증상은 자신이 왜 살며 자신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큰 소망을 이루어지기를 고대하지도 않으며, 멋지고 중요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 모습. 그는 그저 허공을 바라볼 뿐이며 그가 확신하는 단 한가지는 삶에 있어서 가치있는 것은 ‘여기’ 그리고 ‘지금’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런 핵 인간의 증상을 역사적인 단절, 단편화된 이데올로기, 새로운 불멸에 대한 추구라는 개념으로 상세하게 설명해내면서 이 증상을 앓고 있는 핵 인간이 해방되는 길에 대해 나우웬만이 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종적이면서 또한 횡적인 역사 통찰을 통해서 몇가지 단서를 언급합니다. 신비주의적인 방법과 혁명적인 방법이 역사적으로 동원되었지만 결국 그 한계가 있었음을 그는 정확하게 짚습니다. 그러면서 제 3의 길인 그리스도의 모범을 조심스럽게 제시합니다. 제가 ‘조심스럽게’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동안 너무도 흔히 그리스도의 모범을 보인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본질을 잃은 채로 생명을 살리는 사역과는 거리가 먼 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모범으로서의 미래 사역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답하면서 그는 심리학을 공부한 사제답게 첫째, 내면에서 일어나나는 일들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사역자, 둘째 긍휼의 사람으로서의 사역자, 셋째 묵상하는 사람으로서의 사역자 상(像)을 제시합니다.

 

사역자의 역할은 목회적 대화, 설교, 가르침, 교회의 의식 뿐 아니라 모든 삶의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실제적으로 돕는 일인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역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의 특징이 내향적인 세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두 번째 이 세대의 특징을 ‘아버지 상실의 시대’라고 진단한 그가 미래 사역자의 두 번째 모습으로서 ‘긍휼의 사람’을 꼽은 것은 긍휼(compassion)만이 진정한 내적인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권위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서 ‘긍휼’보다 더 적합한 말을 찾지 못했다고 단언합니다.  아버지 상실의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사역자들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주셨던 그 긍휼의 마음을 사람들이 신뢰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뭔가에 쫓기면서 돌발적인 강박 성향을 보이는 것이 이 세대의 세 번째 특징인데, 이러한 세대를 향해 필요한 사역자의 세 번째 모습은 ‘묵상하는 사람으로서의 사역자 상(像)’입니다. 물론 묵상하는 사역자라고 해서 소극적이며 자신의 그림자에 숨어서 세상과 최소한의 접촉만을 시도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실지 모르지만, 나우웬이 말하는 ‘묵상’은 매우 활동적이고 우리를 각성시키는 형태의 묵상입니다.  그가 말하는 묵상하는 사역자는, 자신 안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긍휼로써 자신의 동료를 재발견하게 된 그리스도의 모범자로서의 사역자입니다. 이런 사역자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 자신이 맺는 관계들, 그리고 자신이 개입된 사건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장 긴박하고 직접적인 일과 항상 일정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이 그에 빠져 드는 일이 없도록합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그는 인간과 인간 세상이 지니는 진정한 아름다움, 즉 항상 다르고 항상 매력적이며 항상 새로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합니다. 요구사항이 끝이 없는 인간 세상에 대해서 그시스도의 모범을 보이는 사역자는 비평적 묵상가로서 다가서야 한다는 것이 나우웬의 통찰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지는 듯 합니다. 그래서 저는 비평적 묵상가로서의 사역자에 대해서 나우웬이 표현하고 있는 책의 내용을 발췌하면서 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사역자로서의 본질적인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구 사항이 많은 세상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만이 미래 사역자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결코 한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비평적 묵상가가 될 수 있는 사역자야말로 가장 진실한 혁명가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을 참된 복음으로 검증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고, 공포 때문에 강박적인 사람들을 인도해 그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창조적 행동을 취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생각은 없이 좌절감만 표현하는 사람들에 동조하기 위해 그들이 벌이는 시위에 무조건 동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더 많은 사회적 안전 장치, 더 많은 성찰을 요구하며,  사회에 좀더 기강이 잡히고 좀더 질서가 다져지도록 계속해서 요구만 하는 일에도 쉽게 가담하지 않습니다. 그는 비판적인 눈으로 사태를 지켜보며,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이나 거절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저항하는 자들과 무사 안일주의자들 모두를 그들의 동기가 그릇되고 그들의 목표가 의심스러울 때 비판합니다.

묵상하는 사람은 인간적 접촉에 굶주려 하거나 욕심내지 않습니다. 그는 소유욕이 강한 이 세상의 사소한 관심사를 초월하는 비전을 따라 나아갑니다. 그는 그 때 그 때 유행에 따라 요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근본적이고, 중심적이며, 궁극적인 것을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도 우상을 숭배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동료 인간들이 실제적이며 종종 고통스럽기까지 하고 당혹스러운 질문을 자발적으로 던지게 합니다. 또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그들의 행동 이면(裏面)에 숨겨진 것을 보도록, 문제의 핵심에 이르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도록 그들에게 권유합니다.

묵상하는 비평가는 조작된 세계의 환상적인 가면을 벗겨 버리고, 실제 상황이 어떤지를 보여 줄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로, 미친 사람으로, 사회에 위험한 존재로, 인류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생각한다해도 게의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의 비전으로 말미암아 그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고,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지금 여기(here & now)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소망과 약속의 표징을 찾으려고 합니다. 묵상하는 비평가는 조그만 겨자 씨를 알아볼 수 있는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겨자씨가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13장31~32절)는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

이 책은 젊은 시절 저로 하여금 상담에 관심을 갖도록 한 책이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를 지망하고 있던 고등학생인 나에게 어느 분이 조언해 준 것이, 신학교 입학은 일반대학을 졸업한 뒤 천천히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 먼저 일반대학을 입학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대학생활을 하면서 목회와 신학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나는 헨리 나우웬과 같은 영성 지도자들이 쓴 책들을 즐겨 읽었던 기억입니다. 당시 이 책은 분도라는 카톨릭계 출판사에서 나온 조그만 소책자로 발간된 책이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 상담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을 바꾸게 만든 책이 바로 이 작은 책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는, 상처를 입었으나 그 상처로부터 치유함을 입은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창조적으로 그 상처 너머에 있는 치유의 세계를 아는 자이어야 한다는 통찰을 발견한 나우웬의 영성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