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고급 기독교를 여는 주간지'를 표방하는 들소리 신문사에 실린 주필, 조효근 목사의 글입니다. 몇 해 전 이 신문에 우연히 인터뷰를 응한 적이 있어 저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후부터 이 신문의 애독자가 되었고, 재작년 필자와 함께 소아시아 일곱 교회 등 터키 땅을 다녀온 인연 때문에 계속해서 필자의 글을 애독하는 팬이 되었지요. 소개하는 글은 최근 호에 실린 이 분의 글 입니다. 투박하지만,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올곧게 살아내려고 발버둥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글입니다. <글을 퍼 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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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선포하소서"
간밤의 뒤숭숭한 꿈속에서 빠져나와 기도시간인데 갑자기 ‘말씀을 선포하라!’는 음성이 천정에서 쏟아져 내렸다. 깜짝 놀라 자세를 가다듬었다. 주여, 어찌 해야 합니까? 하면서 몸 자세를 거듭 낮추었더니 다시 들려온다. ‘말씀을 선포하소서’였다. 첫 번째는 ‘선포하라!’하시더니 두 번째는 ‘~ 선포하소서’였다. 내게 말씀을 주시는 이가 주님에게서 천사로 바뀌었는가. 나는 잠시 화자(話者)가 누구인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맑아진 내 마음 속에서 말을 한 주인공이 밝혀졌다. 말씀을 선포하라, 또 하소서,를 거듭 외친 이는 하나님이나 천사가 아닌 나 자신이었다. 차츰 생각이 더욱 명료하게 가다듬어 지는데, 꿈 속에서 있었던 일들까지 떠올랐다. 내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도심 광장, 오후 3시쯤 일까 자못 한가로운 시간인데 꿈속의 분위기에서도 나는 이런 시간이면 저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하나 붙잡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데 말씀을 외칠 수 있는 준비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는 순간에 말씀을 선포하라,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이어서는 선포하소서, 라는 경칭 사용을 하였다.
꿈속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내가 전파하는 것이지만 ‘주님의 직접 선포’로까지 발전해야 ‘말씀’임을 깨달았다. 말씀을 전파하는 자는 ‘단순전파’가 아니라 ‘선포’로 발전해야 한다. 전파는 선전하는 것이고 선포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서 ‘선포’는 ‘계시’하는 것이다.
전도자는 ‘전파’ 할 수도 있어야 하지만 ‘선포’에 중심이 실려야 한다. 전파하는 행위는 주로 입의 기술로 하는 것으로써 주변을 시끄럽게도 하고 말시비도 불러오지만 ‘선포’는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 방식이 신자의 삶, 곧 말씀의 육화(肉化 Incarnation)를 이루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나의 삶이 지금쯤이면 주변의 인심들이 나를 바라만 보아도 그래 저 사람은 예수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네, 잘 익어가네, 잘 다듬어지고 있네, 저 사람 내가 말이야 3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그리고 오늘도 지켜 보지만 이젠 거의 익어가네 작품이 되어 가누만. 저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나는 기쁘네.
그런데, 나의 꼴이 무엇인가? 나의 이 모습 이대로가 마치 성경책을 펴 놓은 것 같은가? 삶이 예수로 길을 잡아야지. 그가 길인데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길이고 진리요 생명이신 이가 나를 이끌어 주시는데 내가 머문 곳에 길이 있는가? 진리가 넘치는가? 생명들의 찬가는 울려 퍼지는가?
아, 나는 무엇인가?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주여, 내 가슴 속에 사신 이시여. 나를 미쁘다 하신 이시여. 그리운 이시여. 내 사랑이시여. 나의 육비에 그 아름다우신 예수, 예수의 이름을 새기시고 기뻐하시고 대견해서 헛, 헛, 허 웃으시며 만족해 하실 이시여. 〈無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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