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산다는 것은 / 혀로 밭을 갈다 - 이영춘

석전碩田,제임스 2022. 11. 16. 06:32

산다는 것은

- 이영춘

산다는 것은,
만나는 일이다
사랑하는 일이다
헤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빈 가슴 털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이다
먼 산 바라보며
그 안에
내 얼굴, 내 발자욱, 내 그림자
그려 넣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다
갈등하는 일이다
매일매일 육중한 시간에 눌려
실타래 풀어가듯
그렇게 인생을 풀어가는 일이다
수틀에 수(繡)를 놓듯
그렇게 인생을 짜가는 일이다
가다가 큰 바다에 이르면
거기서 내 얼굴 찾아 물기를 닦아 내고
또 가다가 큰 산에 이르면
거기서 한숨 돌려 휘파람 부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일
이것이 인생의 주제다
오늘도 우리는 그 주제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 다음 카페 <이영춘 시 창작 교실>에서

* 감상 : 이영춘 시인.

1941년 2월, 강원도 평창군 봉평에서 태어났습니다. 원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국어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64년 강원일보사 문화부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가 그 해 말 곧바로 중등학교 교직으로 옮겨 강릉 경포중, 고성중, 춘천농공고, 춘천여고, 강원대사대 부고 등에서 교사로 가르쳤으며, 1991년부터 교육 전문직인 교육연구사가 되어 춘천여중 교감 등을 역임하고, 2003년 2월 모교인 원주여고 교장으로 재직중 정년 퇴임하였습니다.

1976년 8월 <월간문학>으로 등단 후, 시집으로 <종점에서>(월간문학사, 1978), <시시포스의 돌>(한국문학사, 1980), <귀 하나만 열어 놓고>(문학셰계사, 1987), <네 살던 날의 흔적>(문학세계사, 1989), <점 하나로 남기고 싶다>(오상, 199),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시와시학사, 1994), <난 자꾸 눈물이 난다>(둥지, 1995), <슬픈 도시락>(현대시, 1999), <꽃 속에는 신의 속눈썹이 보인다>(현대시, 2002), <시간의 옆구리>(현대시, 2006), <봉평 장날>(서정시학, 2011), <노자의 무덤을 가다>(서정시학, 2014),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달샘 시와표현, 2015), <따뜻한 편지>(서정시학, 2019), <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천년의 시작, 2020),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실천문학사, 2021) 등을 냈으며, 시선집 <들풀>(북인, 2009), <오줌발, 별꽃무늬>(시와소금, 2016) 등이 있습니다.

원도문학상(1987), 윤동주문학상(1987), 춘천시민상(문화부문)(1999), 경희문학상(1993), 자랑스런동문상(봉평중고)(2001), 강원도교육대상(2005), 대한민국 향토문학상(2005),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2009), 강원여성문학상 대상(2009), 인산문학상(2011), 고산 윤선도 문학대상(2012), 동곡문화예술상(2014), 유심작품상 특별상(2016), 천상병귀천문학대상(2017), 난설헌시문학상(2017), 김삿갓문학상(2020) 등을 수상하였으며 현재는 생활경제 전문 뉴스를 다루는 [MS 투데이] 신문 ‘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이라는 코너에서 시 감상문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늘은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봉평 장날>에 실려 있는 시 한 편을 먼저 읽은 후에 시를 감상해야겠습니다.

혀로 밭을 갈다

- 이영춘

나의 그녀는 이름 없는 시인이다
내가 가끔 봉급을 타
옷가지며 먹을 것을 사 보낼 때면
‘아이구 야아!
네가 혀로 밭을 갈아 번 돈인데
함부로 쓰지 마라’신다
혀로 밭을 갈다니!
학교라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녀,
그녀의 입에서 이런 시가 탄생 되는
저 깊은 생의 옹이,
옹이는
샘물이 되고
길이 되고
그녀를 견디게 하는 기(氣)가 되어
오늘은 시인이 되었나 보다.

- 시집 <봉평장날>(서정시학, 2011)

인은 ‘시를 쓰는 일’을 ‘혀로 밭을 갈아’ 돈을 버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그녀'는 삶의 깊은 옹이가 있는 사람으로, 그 ‘옹이는 샘물이 되고 /길이 된’ 삶 속의 시인입니다. 그 옹이가 자양분이 되어, 나 아닌 상대방의 처지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할 줄 아는 넓은 사람입니다. ‘학교라곤 가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실제로 고향 시골에서 살아가는 실제 인물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쌀 석 되를 훔쳐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몰래 가출하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촌구석에서 그 처지가 될 뻔한 시인 자신을 말하기도 합니다.

영춘 시인의 시를 읽으면 ‘사실적 생동감이 넘치는 시어들로 인해 읽는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요즘 소위 시를 쓴다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란한 말들로 장난을 치는 것과는 달리 누구나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표현들이지만, 삶의 옹이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의 샘물을 길어 올려 시를 짓습니다. 시인은 그런 시어들을 '참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녀의 시편들은 이웃의 아픔이나 비참함을 대신 울어주려고 애쓰는 참말이 되어 시인의 가슴 속뿐 아니라 누군가의 아픈 곳을 대신 보듬어 주는 노래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의 문학이, 그리고 자신의 시가 ‘시대를 대변하는, 아니면 그 언저리라도 잘 긁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는 부담감으로 항상 ‘문학’ 앞에서 혼자 괴로워하며 ‘휘청거리며 울기도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런 면에서 오늘 감상하는 시, ‘산다는 것은’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는 현학적인 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이 어떤 문학의 길을 걸어가야 할지 각오를 다짐하고 또 자신을 반성하는 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에 의하면 ‘산다는 것’은 그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일’입니다. 그런 중에 ‘빈 가슴 털면서 /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이고, ‘먼 산 바라보며 / 그 안에 / 내 얼굴, 내 발자욱, 내 그림자 / 그려 넣는 일’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 ‘가다가 큰 바다에 이르면 / 거기서 내 얼굴 찾아 물기를 닦아 내고 / 또 가다가 큰 산에 이르면 / 거기서 한숨 돌려 휘파람 부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먼 산에서, 또 큰 바다에서 내 얼굴 찾아 그 얼굴에 흐르는 눈물 닦아 내고, 큰 산을 만나면 ‘한숨 돌려 휘파람 부는 일’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마는 ‘저 깊은 생의 옹이가 / 샘이 되고 / 길이 되고 / 그녀를 견디게 하는 기(氣)가 되어’ 오늘의 시인이 되었으니, 그 시편들이 얼마나 주옥같을까요.

종 우리는 ‘’사는 게 뭔지?’ 묻곤 합니다. 많은 고상한 대답들이 있지만, 시인은 담백한 시어로 짤막짤막하게 말합니다. ‘산다는 것은, / 만나는 일이다 / 사랑하는 일이다 / 헤어지는 일이다’라고. 그리고 2연에서도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 견디는 일이다 / 갈등하는 일이다’ '풀어가는 일이다' '짜가는 일이다'

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죽음을 맞는 일, 그것이 우리 인생의 주제라는 말입니다. 그 여정(旅程)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휘청거리고 있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지만, 그것들을 노래하며 살아가겠다고 시인은 다짐합니다.

인으로 ‘산다는 것’은, 아니 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며 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현실을 보고 듣고, 거기에 귀 기울이고, 자신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 그리고 ‘참말’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