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큰사람 /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석전碩田,제임스 2022. 11. 30. 06:39

큰사람

- 김명기

장자인 나는 집안에서 처음 대학을 갔다
마을에서도 유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대학이 못마땅해 통박을 주었고 엄마는
당신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는데 그게 어디냐며
통박을 통박으로 맞받았다 여든 살이나 자신 할머니는
밍기가 이제 큰사람 될 거라고 두고 보라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셨다
할머니는 끼니 때마다 반주 두 잔을 곁들였는데
나는 큰사람이 되기 위해 가끔 반주를 함께 마시기도 하고
주말이나 방학 때면 집 앞 여울가에 나란히 앉아
아버지 몰래 박하맛 나는 수정담배를 나누어 피우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우리 큰새끼 우야든지 마이 배워
꼭 큰사람 되라고 말하시던 할머니
어느 해 이맘쯤 조반과 반주 두 잔을 달게 드시고
짱짱한 가을볕 속으로 꼿꼿하게 떠나셨다
나는 큰사람이 되기 위해 객지와 바다 위를 무시로 떠돌았지만
서른을 지나 마흔 넘도록 사는 일에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
볼 때마다 통박을 주던 아버지마저 선산의 산감이 되고서야
큰사람 되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오십이 넘어 무슨 큰사람이 될까 싶었는데
할머니 기제삿날 옷매무새를 갖추느라 거울 앞을 서성대다
장탄식을 내뱉었다 일백팔십이 센티의 키에 몸무게
백킬로 그램이 넘은 큰사람이 거울이 다 차도록 서 있었다

-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 사람, 2022)

* 감상 : 김명기 시인.

1969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습니다. 관동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부터 <강원작가> 등에 작품을 발표하다가 2005년 <문학나무>와 <시현실> 신인상을 받았으며 계간 <시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문학의 전당, 2009), <종점식당>(애지, 2017),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사람, 2022) 등이 있으며 2017년 대구경북 작가회의가 주관하는 제2회 작가정신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022년 한 해는 시인 김명기에게 상복이 터진 한 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1월에 발표한 제22회 고산문학대상 현대시 부문에서 수상자로 선정되더니, 10월에는 제37회 만해문학상 본상의 영예를 안았기 때문입니다. 두 상 모두 그가 올해 1월 1일 자로 펴낸 세 번째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였으니, 이 시집에 수록된 그의 시들이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 장례를 계기로 고향인 울진군 북면 두천에 돌아와 중장비를 몰며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를 읽으면 시인과 할머니 사이에 흐르는 무한한 애정과 기대, 그리고 할머니의 솔직한 기대감이 그대로 전해질 뿐 아니라 자랑스런 아들을 둔 어미의 사랑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표현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시 행간에서 진솔하게 전달되어 옵니다. 집안의 장남에게 거는 가족들의 기대와 사랑 표현이 각자의 눈높이에 맞게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맨날 통박만 주는 아버지도 사실, 그 통박을 주는 모습이 ‘초등학교도 못’ 나온 경상도 남정네의 그 수준에 딱 맞는 사랑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 그 대학이 못마땅해 통박을 주었고 엄마는 / 당신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는데 그게 어디냐며 / 통박을 통박으로 맞받았다’ 여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가족의 대화 풍경을 그대로 수필을 쓰듯 표현했는데 그것이 그냥 시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중에서도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마음은 그녀가 말했던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그대로 표현한 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여든 살이나 자신 할머니는 / 밍기가 이제 큰사람 될 거라고 두고 보라며 /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셨다’ ‘우리 큰새끼 우야든지 마이 배워 / 꼭 큰사람 되라고 말하시던 할머니 / 어느 해 이맘쯤 조반과 반주 두 잔을 달게 드시고 / 짱짱한 가을볕 속으로 꼿꼿하게 떠나셨다’ 할머니의 말투가 금방이라도 살아서 시인에게 들리는 듯한 경상도식으로 표현된 시어가 참으로 맛깔스럽습니다. 그러나 자칫 시가 너무 우울 모드나 신파조로 빠지지 않도록, 할머니가 늘 이야기했던 ‘큰사람’이 되지 못한 현실의 상황을 거울 앞에 장탄식을 내뱉을 정도로 비대해진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슬쩍’ 빠져나오는 시적 묘사가, 역시 상복이 터진 재능 있는 시인답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의 시들을 두고 고산문학대상 심사를 맡았던 이문재 시인은 “거듭 읽어낼수록 삶의 파장들이 깊은 감동까지 거느리며 가슴속으로 번져나가 그 파문에 흠뻑 젖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으며 “삶의 우여곡절과 신산고초(辛酸苦楚)를 통과해 온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진정성의 언어’로 절묘한 표현이나 세련된 구성이 없이도 충분히 좋은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지에서 ‘큰사람’이 되기 위해서 시인은 여러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원양어선 3년, 구휼미를 배달하는 일, 중장비 기사, 유기동물 구조사, 심지어 도축장에서 개를 잡는 일까지 경험했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 그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시를 쓰는데 무익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삶이 그대로 시가 되고 시집이 되어 세상과 만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같은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다른 시 한 편을 더 읽고 이 글을 맺으려 합니다.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 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 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우린 둘 다 절망이었을 텐데
너는 그 많은 욕과 저주를 어떻게 견뎠을까

- 시집<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사람, 2022)

이 시가 되고, 그 시가 읽는 이에게 위안이 되고 치유가 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극한의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고, 그 슬픔의 끝에서 ‘역지사지’,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그 친구의 안부가 ‘슬쩍’ 궁금해진다는 마지막 문장이 이 시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이 쓴 ‘큰 바위 얼굴’과 시인이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문득 발견한 ‘큰사람’의 이미지가 데쟈뷰처럼 다가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