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비뼈를 얻다
- 문동만
자전거를 타고 핸들을 꺾다 하늘로 떠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유리창에 부딪힌 새처럼 바닥에 널브러졌고 집으로 가는 길은 아득해졌습니다. 사위도 정신도 어두워지고 어렴풋이 누군가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측백나무와 은사시 울타리, 장 보러 가다 말고, 버스를 타러 가다 말고, 약 사러 가다 말고, 가다 말고, 말고 라는 발걸음이, 멈춰 선 발걸음들이 멈추려는 숨을 살렸듯,
그들이 차를 한편으로 통행시키며 구급차를 불러주고 말을 시키며 연고를 물어주던, 소란하되 나지막한 숨결들이었습니다. 안부를 물어주던 핏줄들이 물 같은 피가 됐으므로, 나는 나를 물어주는 말들이 그리웠을 겁니다. 생각나지도 않는 그녀들이 누구였을까요.
누이였을까요, 엄마였고 동창이었을까요, 식당에서 밥 주는 이모였고 요구르트 팔던 바쁘디 바쁜 이브들이었을까요. 그들이 한 끼니 저녁밥을 충분히 먹을 시간만큼, 금이 간 내 갈비뼈를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차가우나 서럽지 않은 바닥에 누워 생각해보니, 아담의 갈비뼈를 추려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은 금이 가버린 가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어느 새 달려 온 나보다 한참 작은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구급차를 타며, 아늑한 추락의 피안 속으로 스며들던, 사이렌 소리도 음악이었던 갈비뼈 얻던 저녁이었습니다.
- 시집 <설운 일 덜 생각하고>(아시아, 2022)
* 감상 : 문동만 시인.
1969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습니다. 1994년 계간 <삶 사회 그리고 문학>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나는 작은 행복도 두렵다>(개마고원, 1996), <그네>(창비, 2009), <구르는 잠>(반걸음, 2018)등이 있으며 산문집 <가만히 두는 아름다움>(예옥, 2020)을 펴냈습니다. 제1회 박영근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2022년 제19회 이육사 시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어느 날, 시인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핸들을 잘못 꺾는 바람에 큰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공중으로 붕 떴다가 다시 떨어지며 옴짝달싹 못 하고 땅에 누워 아득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소란스런 목소리들, 가다 말고 돌아서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마디씩 하는 목소리들이 아득하게 들립니다. ‘장 보러 가다 말고, 버스를 타러 가다 말고, 약 사러 가다 말고’ 멈춰 선 그들이 멈추려는 시인의 목숨을 살렸습니다.
시인은 묻습니다. 그들이 누구였을까. ‘누이였을까요, 엄마였고 동창이었을까요, 식당에서 밥 주는 이모였고 요구르트 팔던 바쁘디 바쁜 이브들이었을까요.’ 생각나지도 않는 그녀들이 시인의 갈비뼈를 잠시 지켜주었습니다. 아니, 진짜 ‘갈비뼈’가 나타나 부축해주기까지 지켜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한참 작은 여자’는 누구였을까. 시의 제목으로 봐선 시인의 아내이기도 했을 듯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나타나서 잠시 그를 지켜주던, ‘생각나지도 않는 그녀들’을 대신하여 작은 그녀가 자신을 부축해주는 순간, 시인은 ‘아늑한 추락의 피안 속으로 스며들’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급차의 급박한 싸이렌 소리마저 ‘음악’이 되었던 그날 저녁, 시인은 ‘갈비뼈’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놓쳐서는 안 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차가우나 서럽지 않은 바닥에 누워 생각해보니, 아담의 갈비뼈를 추려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은 금이 가버린 가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디 ‘아담의 갈비뼈’라는 말의 뜻은, 구약 성경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남자를 잠들게 한 후 그 갈비뼈 중 하나를 꺼내서 그 사람의 아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가설(假說), 즉 남자가 자신의 배필인 여자를 얻는다는 이 말에 ‘금이 가버’렸다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그 보다 더 크고 심오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장 보러 가다 말고, 버스를 타러 가다 말고, 약 사러 가다 말고’ 멈춰선 발걸음들, 진짜 갈비뼈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잠시 지켜줬던 존재였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모든 ‘가다 말고’들이 나를 살렸던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에 등장하는 '갈비뼈'는 이중 시적 은유로, 시인과 모든 그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갈비뼈 같은 존재입니다.
그의 시집에 실려 있는 한 편의 시를 더 읽어보겠습니다.
밥이나 하라는 말
- 문동만
밥 차리러 가는 당신 때문에
나는 살았다
흙 묻은 손으로 씻어준
알갱이들 때문에
밥을 차리러 간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이어가며 살 수 있었다
쌀을 구하려 손발이 닳던 노동 때문에
화구에 불을 넣고 연기를 쬐던
주름진 노역 때문에
수심이 깊은 밥주걱 때문에
개수대로 쓸려가는 수챗물처럼
아무것도 아닌 인생 때문에
밥물이 한소끔 끓을 시간만큼도
못 살다 간 인생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었다
그러니
들어가 밥이나 하라는 말은
쉰밥만도 못한 말
밥을 버리라는 말
밥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
불내의 식구가 아이라는 말
- 시집 <설운 일 덜 생각하고>(아시아, 2022)
이 시에서도 시인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밥을 차리러 간 사람들’ 덕분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밥’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밥을 차리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들어가 밥이나 하라는 말은 / 쉰밥만도 못한 말’입니다. 아니, 밥 먹고 살자고 열심히 살면서 정작 ‘밥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그 말은 ‘밥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 즉 우리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문동만 시인의 시는 섬세하고 자상하고 또 깊고 따뜻합니다. 시인이 시집의 발문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시편들은 ‘그리 대단하지 않고 잔잔하며 오히려 소박’합니다. 낮은 산, 봄에 지천으로 피는 진달래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 속에는 멈추려던 시인의 숨을 살린 ‘나지막한 숨결들’이 있고, ‘개수대로 쓸려가는 수챗물처럼 /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위해서 ‘밥 차리러 간’ 수많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소환해내서 오늘날의 우리와 연결하고 싶어 하는 시인의 애틋한 마음이 엿보입니다.
문 시인은 청탁 원고를 써 보낼 때 자신의 이력을 가능하면 짧게 써 보낸다고 했습니다. 압축이 묘미인 시를 쓰면서 시보다 더 긴 이력이 ‘불편하고 어색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겸손하게 말합니다. 시를 통해 사람들을 이어주는 일을 하려면 삶 속에서 그저 ‘구급차를 불러주고 말을 시키며 연고를 물어주는’ 소소한 일들이 필요할 뿐이라는 시인의 ‘큰 생각’에 동의하게 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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