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거룩하다
- 김준태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한 그릇의 물일랑도 엎지르지 말라
물 속에는 사람의 하늘이 출렁이나니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그대여
한 삽의 흙일랑도 불구덩이에 던지지 말라
오늘 우리는 달팽이라도 어루만지자
오늘 우리는 풀잎이라도 가슴에 담고 설레이자
풀 여치, 지렁이, 장구벌레, 물새, 뜸북새, 물망울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우리 이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며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
우리 이제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고
바람이 어찌하여 불어오는가를 귀기울이자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우리 이제 물과 흙 속에 뼈를 세우고
옛사람 잠든 산천에 찔레꽃이 피어나듯
물거품 같은 빛깔도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하듯이
우리가 사람과 사람이라는 사실을 끝끝내 노래하자
- 시집 <국밥과 희망>(풀빛, 1984)
* 감상 : 김준태 시인.
1948년 7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일어 교육과를 졸업하고 전남고, 신북중 교사로 가르쳤으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전남매일신문 6월 2일자 1면에 실려 재직하고 있던 전남고등학교에서 해직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계엄사의 검열로 그가 쓴 시는 원문 시 105행 중 거의 대부분이 삭제되어 불과 34행만이 신문에 실렸지만, 시 전문(全文)이 비밀리에 수천 수 만장이 인쇄되어 국내외로 배포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이 시는 한국 문단이 낳은 최초의 '5월 시’가 된셈입니다. <광주매일> 편집국의 부국장, 문화부장, 조선대학교 초빙 교수, <5.18 기념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9년 <시인(詩人)>지에 ‘머슴’, ‘詩作을 그렇게 하면 되나’, ‘어메리카’, ‘신김수영(新金洙瑛)’, ‘서울역’, ‘아스팔트’ 등이 추천되어 등단하였고, 같은 해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참깨를 털면서’가, 삼남교육신문 신춘문예에, 1970년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 <참깨를 털면서>(창비, 1977),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한마당, 1981), <국밥과 희망>(풀빛, 1983), <넋 통일>(전예원, 1986), <불이냐 꽃이냐>(청사, 1986),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 도시여>(실천문학사, 1988, 5월의 노래 시선집), <칼과 흙>(문학과지성사, 1989),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창비, 1994), <지평선에 서서>(문학과 지성사, 1999), <오월에서 통일로>(빛고을출판사, 1999, 김준태 시, 홍성담 판화), <밭詩>(문학들, 2014), <달팽이 뿔>(푸른사상, 2014), <쌍둥이 할아버지의 노래>(b, 2018), <밭시, 강낭콩>(모악, 2018), <도보다리에서 울다 웃다>(작가, 2018, 통일시집) 등이 있으며, 세계문학 기행집 <세계문학의 거장을 만나다>(한얼미디어, 2006), 남과 북, 해외동포 시인들이 쓴 통일시에 해설을 붙인 <백두산아 훨훨 날아라>(글누림, 2007) 등의 책을 냈습니다. 그의 초창기 시는 고향과 산업화로 메말라가는 정서를 노래하는 시였다가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민주화와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경향시, 또 전쟁을 반대하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시, 통일을 염원하는 시로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 설교에서 목사님이 이 시를 소개하였는데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 우리 이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며 /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 / 우리 이제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고 / 바람이 어찌하여 불어오는가를 귀 기울이자’는 대목을 듣는 순간 정신을 번쩍 차렸습니다. 이 부분만 들었을 때는 목사님이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라는 시를 소개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목사님은 ‘우리가 도무지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흐르는 강물에 발이 좀 젖으면 어떻습니까? 먼저 우리 가슴에 깃든 날카로운 칼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땅 위의 칼들도 녹슬게 됩니다. 누군가를 베고 찌르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바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달팽이, 풀 여치, 장구벌레, 물새 등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세계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라고 설교하며 시의 내용을 설명하였는데, 예배가 다 끝날 때까지 이 시 전체를 읽고 싶어 얼마나 조바심이 났는지 모릅니다.
이 시의 전체 주제는 2연의 마지막에 반복되고 있는 두 행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땅 위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지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벅찬 감격으로 연거푸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새벽마다 하루를 맞을 때마다 새롭게 인식하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로 시작된 시는 연을 거듭할수록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와 같이 감격하는 감탄사가 덧붙여져 그 감격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있음의 감동을 다 표현할 길이 없는 듯이 살아 있는 ‘인간은 거룩하다’고 아예 시의 제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다면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며 /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야 할 것을 촉구합니다. 기꺼이 내 발을 적시면서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는 수고와 희생을 하되, 새벽에 깨어 하루를 새롭게 맞이할 때마다 그리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과 흙’으로 대변되는 ‘강 건너 마을 사람’ 사이에서 살아있는 ‘사람과 사람’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일에 끝까지 실패하지 말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 '아름다운 대동(大同) 세상'을 꿈꾸는 시인의 멋진 노래입니다.
글의 도입부에서도 언급했듯이, 정희성 시인의 시를 이쯤에서 다시 한번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비, 1978)
거의 연배가 비슷한 두 시인(정희성은 1945년생, 김준태는 1948년생)의 시를 읽으면서, 동일한 느낌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김준태의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이나 정희성의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이나 동일한 시적 은유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떠 있지만 그 물에 휩쓸려 비루(鄙陋)하게 살아가지 말고, 그 ‘물과 흙에 뼈를 세우고’ ‘끝끝내’ 흔들리지 말자고, ‘바람이 어찌하여 불어오는가를 귀기울이자’고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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