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 서정학
아름다운 사람들은
가슴에
한 사람쯤 묻고 산다.
마음의 골짜기 깊은 곳에
왕릉 같은 봉분封墳이 있어
켜켜이 쌓인 기억의 회랑回廊을 지나면
봉분 깊숙한 곳에 담긴 깃털 하나.
아름다운 사람들은 가슴에
한 사람쯤은 묻고 산다.
-신작시집 ‘반달과 길을 가다’(북인, 2019년 6월)에서
* 감상 : 충북 충주 출생. 1980년 <시문학> 주최 전국 대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시 '벌목(伐木)' 당선으로 초회 추천, 1986년 <심상> 신인상 및 <세계의문학>에 작품을 발표, 정식으로 등단했습니다. <문학마당>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두원공과대학 (아동복지과)이 있는 경기도 안성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있는 시인입니다. 시집으로 <말의 나라>(둥지, 1993), <죽산에 이르는 길>(문학마당 시선1, 성민, 2002), <반달과 길을 가다>(북인, 2019) 등이 있습니다.
지난 주, 17년 만에 세 번째 시집 <반달과 길을 가다>를 출간했는데 이 시집에는 ‘반달과 길을 가다’를 비롯해 ‘비밀 정원에서 한때’ ‘뜰 앞에 잣나무’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춘천에서 쓰다’ ‘참회’ 등 모두 72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은 2014년 ‘위장관 기질 종양’이란 희귀성 암 수술을 받고 암 투병을 하면서 쓴 작품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아름다운 사람’을 읽으면 유난히 시인의 가슴에 ‘그리움’의 냄새가 짙게 베여 있는 듯 합니다. 가슴 속 한 켠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을 그는 ‘가슴에 묻고 산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묻는다’는 단어를 시적 은유로 삼아 ‘왕릉 같은 봉분’, ‘기억의 회랑’ ‘봉분 깊숙한 곳에 담긴 깃털’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시간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자유롭게 그 사유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그리움’은 오래 묻어 둔 한 사람, 그 한 사람 때문에 생긴 것이지만,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그것을 왕릉의 봉분처럼 오래 묻어두면 그저 가벼운 깃털 같이 되기 때문에 ‘그리움’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가 2015년 시 전문지인 <시와 경계>에서 특집 기획을 낼 때, 청탁 받은 원고를 쓰면서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쓴 글이 있어 그 일부분을 이곳에 한번 옮겨와 봤습니다.
[....(전략) 나의 시적(詩的) 출발은 80년대이다. 사회학적, 역사적 상상력이 주류를 이루던 그때 나는 참여시인도 모더니스트도 서정주의자도 아닌 모호한 시들만 썼다.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는 포스트모던한 시도 못 써봤고, 그렇다고 정신주의 시인도 아니었다. 시인이란 말과는 거리를 둔 채 살았다. 시단 활동에는 발을 끊고, 지역의 시인들과의 교류도 마찬가지였다. 강의가 끝나면 같은 동료 교수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고, 지게차 사장, 철물점 사장, 측량설비 사장, 고등학교 교사들과 운동하고 맥주 마시며 나름대로 잡놈으로 즐겁게 살았다.
‘훌륭한, 좋은, 존경받는, 탁월한’과 ‘못된, 나쁜, 손가락질 받는, 능력 없는’ 이 중간에 서 있는 가장이며 남편이며 선생이며 친구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잠깐이나마 서게 되자, 국면이 바뀌게 되었다. 그동안 살아온 생에 대한 반성과 회한이 그리고 남은 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아스라한 영역에 서자 모 철학자의 언급처럼 ‘투철함’이라 할까? 간절함이라고 할까? 예전보다 진지하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와 주위의 사람들과, 사물과 세계와의 관계와 교감이 새로운 의미와 국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시 쓰는 것, 가르치는 것의 의미와 절실함이...(후략)]
삶과 죽음의 그 아스라한 경계에서 만난 사물들, 삶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 이번에 발행 된 그의 시집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의 시에는 유난히 그리움이 더 사무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집의 제목으로 잡은 ‘반달과 길을 가다’라는 작품을 덤으로 소개해 봅니다.
반달과 길을 가다
- 서정학
저물 무렵 길을 나서다.
멀고도 가까운 길을 달과 함께 가다.
언젠가의 초승달, 엊그제의 보름달
오늘은 반달과 함께 가다.
절반의 쪽진 얼굴, 절반의 미소, 절반의 말言들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아는 사람 같기도 한 그와 같이 길을 가다.
절반의 기쁨, 절반의 사랑, 절반의 희망
그러나 딱 둘로 나눌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여
둘로 가를 수 없는 희망과 절망이여
반절의 추억, 반절의 속삭임, 반절의 꿈이여
스러져가면서 삭아지면서 부르는 노래
나비의 날갯짓처럼 소리도 없이 다가와
어깨에 쌓이는 반절의 달빛과 함께 가다.
머리에 절어있는 반절의 어둠과 함께 가다.
들판마다 눈발처럼 쌓이는 달빛을 지우며
구름이 가다. 양떼 같은 구름이 가다.
뭉게구름 같던 네가 가다. 내가 가다.
달빛은 어둠을 지우고 구름을 달빛을 지우며 가다.
반만큼의 절망, 반만큼의 사랑, 반만큼의 그리움
반달과 함께 내가 가다. 네가 가다.
눈물로 빛나는 별까지 데리고 가다.
- <발달과 길을 가다>(2019)
어느 날 덜컥 찾아 온 병마 때문에, 아직도 달려갈 길이 먼데 그저 반쪽만 달리고 만 것 같은 아쉬움과 회환, 후회가 뒤섞여 있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삶의 경계에서 늘 서성거리며 살아왔으나, 삶과 죽음의 아스라한 영역에 서게 되면서 이제 좀 더 투철함과 간절함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는 시인처럼, 이 아침 그의 시를 읽으면서 절실하고 투철하게 주변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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