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隨筆 · 斷想

성탄절에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을 묵상함

석전碩田,제임스 2017. 12. 27. 15:25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어느 수업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곤 합니다. 학생들에게 이런 저런 화두를 던지기를 즐겨 하셨던 한 교수님이, 그 날은 미국의 교육심리학자인 브루너(Bruner, Jerome Seymour)' 나선형 교육과정'을 소개하면서, 그가 주장했던 유명한 가설을 설명하셨는데 그 때 사용했던 표현인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표현 때문입니다. 그 이후 나의 삶에서 '본질적으로'라는 표현만 나오면 그때의 그 수업 장면이 떠오르게 되었을 정도로 아마도 나에게는 그 수업의 인상이 컸나 봅니다.  

 

'어떤 교과든지 그 지적(知的) 성격에 충실한 형태로 표현하면 어떤 발달 단계에 있는 어떤 아동에게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가설이 브루너가 주장했던 나선형 교과과정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물리학을 공부하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은 물리학자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을 한다' 는 말은 그의 이 가설을 설명하는 유명한 표현입니다. 물론 여기서 '동일하다는 것'은 모든 점에서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학생이 배우는 물리 내용이 물리 학자가 다루는 물리 내용과 그 종류와 수준에 있어서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말하는 '동일하다'는 의미는 '지적(知的) 성격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물질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실험을 하는 초등학생의 행위나 새로운 과학 개념을 발견해 내는 과학자의 행위는 가설을 설정하고 실험을 한 후 가설이 유의미한지 여부를 판정하는 과학적인 사고 과정의 형태를 갖추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리학자가 다루는 물리 내용을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수준에 맞게 번역하여 개념이나 원리 등 그 내용의 성격을 동일하게 유지하기만 한다면, 학생들의 발달 단계가 높아짐에 따라 점차 세련된 형태로 가르치도록 계획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교육과정을 브루너는 '나선형 교육과정'이라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왜 뜬금없이 30년 전의 이 수업 시간이 생각이 났느냐구요  

 

지난 주말과 성탄절 기간, 멀리 경상북도 성주, 고향 마을을 다녀오면서 23일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고가면서 고속버스 안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어릴적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고향 산천을 추운 바람 맞으며 거닐어 보기도 했고, 또 어슬렁거리다가 문이 열려 있는 이웃집에 들러 따뜻한 구들목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도 나누었던 짧은 시간들이 얼마나  감사하고 즐거웠는지 모릅니다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조금 떨어졌지만, 넓은 산을 확보하여 산중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마을 형님을 방문했던 일, 그리고 선영 바로 옆에 들어선 조그만 절에서 법회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만남들을 가진 시간들은 지금 되돌아봐도 값진 순간들이었습니다

 

특히 절에서 가진 법회 경험은 특별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보니 그 날은 법회를 끝내고, 다음 해를 위해서 신도들에게 각자 소임을 맡기면서 근사한(?) 임명장을 수여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런 장면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스님에게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향 동네 아재의 논을 구입해서 그 곳에서 사찰을 지어보겠다고, 작은 컨테이너 하나 갖다 놓고 불사(佛事)를 시작할 때만해도 이게 되는 일이긴 할까, 제 삼자 입장에서 걱정이 될 정도였지요. 그런 젊은 스님과 알고 지낸지도 10년은 훌쩍 흐른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근사한 본당 건물 뿐 아니라 식당 등 부속 건물이 대여섯채는 될 정도로 제법 여느 절 못지 않은 규모를 갖추었고, 제법 조직을 갖춘 신도회도 구성되어 임명장을 수여할 정도가 되었으니 정말로 놀랄만한 일이 맞습니다.

 

그를 보면서, 갑자기 내 마음 속으로 떠 오른 한가지 단어가, 바로 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종교로는 불교라는 그릇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곳곳에 십자가를 내 걸고 성업(?) 중인 교회의 목회자들이 하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 콘텐츠(내용)가 어떤 것이든 그것을 통해서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모으는 일, 바로 그것이 기독교의 목회의 본질이며, 또 불교에서 말하는 불사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은, 결국 "나에게로 사람들이 오도록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생각이 이렇게 미치자 갑자기, 2 천년 전 이 땅을 거니시면서 두 팔 벌려 사람들을 초청하셨던 예수의 음성이 바람 결에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가복음 117)"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누가복음 1816)"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날마다 이런 초청장을 보내면서 기꺼이 고아와 과부, 절름발이와 소경, 문둥병자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를 따르는 자라면, 그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성탄절을 경건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