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1분 묵상

얄묘조장(揠苗助長)]

석전碩田,제임스 2015. 2. 3. 00:29

[오늘의 양식 묵상 - 얄묘조장(揠苗助長)]

 

Always abounding in the work of the Lord, knowing that your labor is not in vain in the Lord. —1 Corinthians 15:58 (Read 딤후 2:1~6)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린도전서 15:58 (본문 딤후 2:1~6)

 

알묘조장(揠苗助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 크게 하려고 곡식의 고갱이를 뽑아 올린다'는 말로 '성공을 서두르다가 도리어 일을 망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上)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 반드시 의(義)를 쌓는 것을 일삼고 그 효과를 미리 짐작하지 말며, 혹 가득 차지 않게 될 경우에는 다만 마땅히 자기가 할 일이 있음을 잊지 말도록 할 일이지, 일을 꾸며서 그것이 자라나도록 도와서는 안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 송(宋) 나라에 어리석은 농부가 하나 있었다. 모내기를 한 이후 벼가 어느 정도 자랐는지 궁금해서 논에 가보니 다른 사람의 벼보다 덜 자란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농부는 궁리 끝에 벼의 순을 잡아 빼보니 약간 더 자란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 하루 종일 벼의 순을 빼느라 힘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자 식구들이 기겁하였다. 이튿날 그의 아들이 논에 나가보니 벼는 이미 하얗게 말라 죽어버린 것이다. (농부는 벼의 순을 뽑으면 더 빨리 자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였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싹을 뽑아 올리는 일을 하지 않는 자가 적다. 호연지기(浩然之氣) 같은 것은 무익하다고 해서 내버리는 자는 곡식을 김매지 않는 자이다. (또 호연지기가 귀한 줄은 알면서도 북궁유나 맹시사처럼)이를 억지로 자라게 하는 자는 싹을 뽑아 올리는 자이다. 이런 일은 한갓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것이다.>

 

논어(論語) 자로편에서 공자(孔子)도 '서둘러 가려다 오히려 이르지 못한다[欲速則不達]'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빨리 서두르다 보면 도리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는 의미가 있는 동양 고전의 말들입니다.

 

그리고 이 '알묘조장(揠苗助長)'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면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며, 짧게 줄여서 '알묘(揠苗)' 또는 '조장(助長)' 등으로 쓰여지는 말입니다.

 

*

 

성경을 묵상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성경에 간단하게 기록된 표현이, 짧게는 2천년 길게는 4,5천년의 세월을 두고 전해져 내려 오면서 그 진짜 의미들이 엄청나게 축약되고 함축되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2천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오늘 날, 그 말씀을 읽는 우리들이, 처음 성경이 씌여질 당시의 그 의미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기록되어 진 텍스트로서의 문자에만 매달려 해석하고 그것을 지식으로만 이해하다 보니 오해를 하게 되고, 항상 그 둘 사이에 간극이 벌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삶 속에서 묵묵히 기다리면서 살아내기 보다는 너무도 성급하게 그 결론을 보고 싶어하다가 실패하는 경험을 할 때마다 묵상되어지는 화두입니다.

 

가령, 요한복음 13장 1절에 요한이 기록한 표현을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이 화자(話者)가 되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한 줄을 쓰기 위해서 요한은 스승인 예수가 죽은 지 적어도 50년 또는 60년을 더 살아내면서, 그 스승이 어떤 분이셨는지 또 그가 하셨던 말씀 말씀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삶 속에서 깨닫고 이해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동료 베드로가 순교하는 모습도 지켜보았고, 수많은 동료들이 핍박을 받아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분은 말씀 그 자체로 오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도 동시에 알게 되었습니다.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밧모라고 하는 작은 섬에 유배되는 핍박을 받는 중에 만나게 된 구주이신 예수. 그를 삶의 체험으로 알고 난 후, 그는 아주 간단하지만 강력한 한 줄 네레이션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하자면, 요한의 이 짧은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이 겪어냈던 그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의 눈물과 고뇌, 두려움과 절망 등을 체휼하면서 온 몸으로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눈으로 읽히는 문자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말씀이 살아 숨쉬는 상황은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쓴 바울 서신을 읽을 때마다 도전을 받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편안하게 책상에 앉아서 그 한 줄 한 줄을 써내려 간 게 아니라, 온 몸을 던지는 삶 자체로 편지를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서신들을 읽을 때에 그저 머리로만 읽는 다면 도저히 그 본래의 뜻을 따라잡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6절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자가 되는 일을 농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쓴 격려의 편지 속에서 제자를 키우는 일은 농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해야 하는 힘든 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수고의 열매를 빨리 보기를 원하지만, 자라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중국 속담이 적절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과정을 서둘러 하려는 어떤 노력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격려의 편지를 쓴 것은, 그가 단순히 디모데보다 더 많이 아는 지식을 자랑하거나 뽐내기 위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치열한 삶을 살아내면서 스스로 몸으로 깨달은 바를, 확신을 가지고 영적인 아들에게 전수해주려고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우리는 충성스럽게 수고하고 또 노력해야 하지만, 모든 것을 자라게 하시는 주님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뿐 아니라, 말과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살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고전 3 : 7).

 

Dear Lord of the harvest, help us to work faithfully as we wait patiently on You for the fruit. Encourage us when we are discouraged and strengthen us when we are weary. Help us to see that we sow the seed, God produces the harvest., for You are faithful.

 

추수하시는 주님, 충성스럽게 수고하며 열매가 열리기를 인내함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리게 하소서. 우리가 낙심될 때 위로하시고, 피곤할 때 강건하게 하소서. 주님은 신실하시니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씨를 뿌리지만 거두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게 도와주옵소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