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隨筆 · 斷想

2011.12.31 한 해 마지막 날에 만난 은경이

석전碩田,제임스 2011. 12. 31. 23:07

정확하게 26년 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당시 이등병 쫄병으로 자대배치를 받아 군 생활에 적응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였습니다. 초등학생들이 보낸 위문편지 중에서 반송 주소가 있는 편지들을 골라 답장을 쓰는 일을 하다가 알게 된 펜팔이 은경이입니다. 이제는 서른 후반, 아이 넷을 거느린 주부가 되었지만 그 후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귀한 삶의 친구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해를 맞는 연휴 기간 동안 오랜만에 만나 한끼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은경이를 펜팔로 알게 된, 특별한 사연은 몇 해 전 어느 수필집에 기고하여 실렸던, 아래의 저의 글을 읽으면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

 

 

 

잊을 수 없는 사람--

 

은경이의 고향, 계란리의 정겨움 아직도 잊지못해

 

배동석 

(서울 생명의 전화 교육위원, 홍대신문사 간사) 

 

내가 은경이를 처음 알게 된지도 벌써 12년이 지났다.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 늦은 나이에 군 복무를 시작할 때였다. 겨울의 초입인 12월초에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은 졸병에게는 유난히도 춥고 어렵게 느껴지는 겨울이었지만, 아주 우연히 알게 된 은경이 덕분에 일병으로 진급할 때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나에게 있어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차가운 물에 손을 넣으면서 내무반의 모든 청소걸레를 세탁하는 일, 그 당시까지도 내무반의 중앙에 놓여있었던 전설적인 빼치카를 피우기 위해서 연탄 창고에서 탄가루를 퍼 날라야 했던 일, 내 식기 뿐 아니라 고참들의 식기까지도 찬물로 세척해야 했던 일 등 책장만 넘기면서 공부했던 나로서는 고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해 12월에 나는 손가락 세 개에 생인손이 생겨 무척 고생을 많이 했다. 아무 외상없이 손가락 밑이 아파 오면서 심하게 곪아버리는 생인손의 아픔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불행히도 그로 인해 결정적으로 동생뻘 밖에 안되는 내무반의 고참들에게 소위 꾀병과 요령을 피우는 고문관으로 낙인을 찍히고 말았고 군대생활 초반부터 이런 저런 사소한 일로 어려움을 겪었다  

 

어느 날 내무반을 들어서는 나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내 눈을 의심하고 싶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큰 박스 하나 가득 담겨져 있는 위문편지들의 더미였는데 그 편지들이 봉투에서 한번도 뜯겨지지 않고 곧바로 휴지통으로 내버려지는 광경은 어릴 적 국군장병 아저씨께 수없이 위문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길 원했던 나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나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예쁘게 쓴, 여학생의 편지라고 추정되는 몇몇 편지들만이 고참들에 의해 골라지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그냥 버려지고 있었다. 재빨리 내무반 청소를 끝내고 한쪽 옆으로 박스를 밀쳐놓은 후 편지봉투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내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버릴 때 버리더라도 한번이라도 읽고, 또 답장을 해 줄 수 있는, 주소가 있는 편지는 답장을 해주어야 겠다는 엉뚱하고도 재미있는 생각이었다. 연필로 쓴 정성어린 편지에서부터 발신인 없이 단체로 의무적으로 쓴 흔적이 보이는 편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지가 있었다. 읽으면서 나는 발신자의 주소가 있는 편지들은 따로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골라진 편지가 대략 30여통. 그 때부터 나는 시간의 여유를 두고 한 사람 한사람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어려운 군 생활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은 셈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한 통의 편지를 받고 기뻐할 어린 학생들을 상상하면서 쓰는 편지쓰기의 즐거움은 대단한 보람이었다  

 

은경이의 편지를 다시 받게 된 것은 그 일이 있은 몇 달 후였다. 전혀 예기치 않은 한 통의 편지였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은경이가 나의 펜팔이 된 것이다. 몇 번의 편지가 오고 가면서, 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건 몇 주 후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은경이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의 학생에게서 편지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가 옆집에 사는 은경이가 군인 아저씨로부터 편지를 받는 게 샘이 나서 자기도 편지를 보내 오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같은 마을에 사는 세 명의 친구, 은경이와 은영이 그리고 영복이를 한꺼번에 펜팔로 사귀면서 나의 군대 생활은 하루 하루가 즐거워지고 있었다  

 

내가 첫 휴가를 나올 6, 7월 무렵, 나는 또 다른 엉뚱한 계획을 꾸몄다. 그것은 아직도 서울 구경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는 은경이와 친구들을 여름방학 기간동안 서울 나들이를 시켜준다는 계획이었다. 편지가 오가며 서로에 대해서 알게되면서 나의 이런 제안은 어린 그들에게도 엄청난 기쁨으로 받아 들여 졌고, 내가 근무하는 부대에서도 부대장이 위문편지가 계기가 되어 사귀게 된 어린 학생들을 서울로 초청하겠다는 나의 첫 휴가 계획을 전해 듣고 보람된 일이라면서 휴가 일정을 배려하고 격려도 하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었다. 나로서는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주위의 부러움과 격려 속에 첫 휴가를 떠나기 일주일 전, 날아든 한 통의 편지는 나를 실망시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허락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담긴 은경이의 편지였다. 나의 실망도 실망이려니와 은근히 일의 진행을 지켜봐 주던 부대장과 내무반원들의 실망도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 당시 우리사회는 어린 여학생을 인신매매로 팔아 넘기는 일이 사회 문제로 연일 신문지상을 채우는 서글픈 때이기도 했다. 어린 딸을 아직 얼굴도 한번 본적이 없는 낯선 군인에게 보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막상 계획이 무산되는 불가 통보의 편지는 나에게 엄청난 실망과 좌절을 주는 것이었다. 나의 순수한 마음이 순수한 마음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악한 세태가 나를 절망케 하였고, 또 그러한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나를 실망하게 하였다  

 

이런 나의 실망과 좌절,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서글퍼하는 나의 마음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나는 은경이 아버지에게 보냈다. 나의 장문의 편지가 은경이 아버지를 감동시킨 것이었을까. 나의 그 편지를 읽고 은경이의 아버지가 서울 나들이를 허락했다는 전보가 내가 첫 휴가를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도착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은경, 은영, 영복의 서울 나들이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격려 속에 이루어졌고 그 해 여름은 그 어떤 해의 여름보다도 더 멋진 여름일 수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그들을 데려 오기 위해 충청도 계란리 산골 마을을 낯설게 들어설 때, 온 마을 사람들이 마당과 동네 어귀에서 부끄럽게 내다 보던 그 정겹던 광경을 잊지 못한다. 여름 밤, 시골 마을 대청 마루에서 산 수박을 갈라놓고 낯선 군인이 얘기하는 이런 저런 얘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이던 온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어린 세 소녀를 데리고 서울 길을 떠나는 청년에게 마늘 한 접을 보자기에 싸서 손에 쥐어 주며 착한 청년이라고 격려하시던 은영이 할머니의 그 정겨운 손을 잊지 못한다  

 

은경이는 지금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와서 아내와 얘기를 하다 돌아가곤 한다. 은영이와 영복이는 지난해 시집을 갔다. 아내와 함께 다른 곳은 못 가더라도 그 결혼식에는 꼭 가야된다고 일부러 갔던 지난 여름의 기억이 새롭다. 이렇게 해서 맺은 인연은 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