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정초, 아내와 함께 새로 완전 개통된 인천공항철도를 시승하고 돌아 온 직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학교 일직근무자로부터 걸려온 다급한 전화는, 긴급 회의가 있으니 속히 학교로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긴급회의라, 새해 첫 날부터 무슨 일이 생겼길래 이렇게도 다급하게 소집을 하는걸까?
궁금도 하지만, 편안한 휴식을 방해 받은 짜증스러움으로 회의에 참석했더니, 그 내용이 사뭇 긴장된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건물 경비직 근로자들과 청소와 미화를 담당하는 미화직 근로자들을 관리하는 용역업체와 학교간에 재계약이 무산되면서 건물 경비 및 청소 업무가 마비될 상황이므로 비상 대책을 당장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의 마라톤 회의 결과 결국 교직원들이 임시 방편으로 각 건물의 경비를 맡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집에서 쉬고 있는 모든 동료 직원들에게 연락하는 등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하기로 하였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교직원들의 사정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용역업체 소속인 경비 및 미화직 근로자들은 졸지에 직장을 잃어야 할 안타까운 절박한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새해 첫 주부터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은 고사하고, 밤을 새워 비상근무를 하고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학교를 지켜내느라 어수선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시무식이 계획된 3일에도 경비, 미화직 근로자들이 총장실을 점거하여 농성을 시작하면서 학교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직장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현실을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또 최근 나와 관련된 여러가지 주변의 상황들을 곰곰히 반추하다가, 구약의 요나서가 뜬금없이 묵상이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요나가 겪었던 배 위에서의 경험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들과 겹쳐지면서 하나의 <은유>처럼 다가왔다고나 할까요. 요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치 않고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 가는 것을 교훈하여 결국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는 것이 요나서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가서 외치기를 원하는 도시, 니느웨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요나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을 것 같은 선원들이 광풍을 만나 배에 실은 모든 짐들을 바다로 내 던지고 또 각자의 신들에게 온갖 간구와 기도를 드려도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상황을 만나는 것. 그래서 제비를 뽑아 결국 그 원인이 배 밑창에서 자고 있는 요나에게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까지 겪어야 했던 선원들의 어려움. 이 모든 것이 마치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주변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순종치 않고 아직도 목이 뻣뻣하고 교만한 요나를 교훈하기 위해서 애꿎은 선원들을 힘든 상황 가운데 몰아 넣은 것처럼, 결국 덜 된 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경비직과 미화직의 근로자들을 이렇게까지 어려운 애꿎은 상황가운데로까지 몰아부치신 건 아닌걸까 하는 그런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제비에서 뽑혀, 결국 이 모든 일의 근원이 요나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모든 선원들에게, 요나가 당당하게 서서 했던 말이 큰 북소리가 되어 계속해서 제 마음을 때리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욘1:12)
오늘 오후에는, 춥고 힘든 농성장을 빠져 나와 예전 자신이 근무하던 경비실의 뒷 방에서 잠시 쉬고 계신 한 경비 아저씨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게 해 달라고. 바로 저의 연고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내가 안다는 고백까지도 기도 중에 했던 것 같습니다.
요나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대충 흉내만 내는 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행동하라고 요청하시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과 그 말씀에 청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요나서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지만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 요나. 그것을 요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래서 모든 일에 말씀의 원칙에 비추어 스스로 부족함이 없도록 자기자신을 단도리할 줄 아는, 누구보다도 성경 말씀의 기준에 따라 잘 살아가는 자신을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믿고, 말씀의 기준대로 살지 못하는 주위의 동료 신자들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말씀의 잣대로 지적하면서 판단했던 저의 모습을 떠 올려봅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고 판단하고 정죄했던 자신입니다. 신앙의 원칙을 내 세우지만, 정작 인애와 사랑은 잃어버린 바리새인의 모습이 바로 나였습니다. 원칙과 규범은 알고 지켰으나, 사랑과 인애는 알지도 못하고 버렸으니 하나님을 제대로 신앙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지요. 선지자 요엘을 통해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나니"(욜2:13)라고 말씀하신 바대로, 인애와 사랑의 하나님은 알지 못하고, 그저 겉으로 옷을 찢는 원칙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했던 율법적인 신앙인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요나서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우주의 만물을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면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다시 확인시켜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요나가, 말씀을 거역하고 그 정반대인 다시스로 향하고 있을 때 조차도 하나님은 요나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고 계셨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습니다. 다시스로 가기로 마음 먹고 배를 타기 위해 욥바 항구로 갔을 때,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요나가 만났다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만물을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린 인생은, 눈 앞에 펼쳐지는 형통한 상황에 속아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또 하나님의 낯을 용케도 피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지만, 결국 그 상황 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임을 어리석은 인생이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이면(裏面)에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옥죄게 하는 무섭고 두려움의 근거가 아니라, 우리에게 위로가 되며 또한 힘이 되는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만나게 하기 위하여,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요1:17)하시는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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